"순례는 길의 끝이 아니라 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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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는 길의 끝이 아니라 길의 시작이다"
  • 민경중대표기자
  • 승인 2016.08.20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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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걷는 제주 기독교 순례길 2편]
산티아고 순례길

# 떠나보렴, 길이 부른다면

 

마이애미 항구에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친구가 말했다.

“가끔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것만을 기억하고 실제가 어땠는지를 잊어버리지. 영화 <십계> 기억하나?”

“그럼,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지팡이를 들자 바닷물이 쩍 갈라졌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잖아.”

“성서에서는 그와 달라.”

친구가 말했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했어.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말하라,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지. 홍해가 갈라진 건 그 다음이야. 결국 길을 갈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길이 열리는 법이지.”

 

이 짧은 이야기는 <순례자>를 쓴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책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온다.

홍해는 길을 갈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파울로는 같은 이야기를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도 말한다.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하려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라. 거리 짐 등을 따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체력만 된다면 그냥 해보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길이 말해준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실제 와보면 많이 다르다. 중요한 건 현장에서 부딪치는 것이다. 결심했을 때 그냥 첫 발을 떼라. 일단 길을 나서면 영적인 기운이 목적지까지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순례란 그런 것이다. 순례는 오래된 기독교의 영성수련 가운데 하나이다. 순례 하면 으레 ‘성지순례’의 다른 말로 쓴다. 학자들은 성지순례의 유래를 성경에서 찾고 있는데, 이스라엘 남자들이 유월절과 오순절 등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지내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순례는 그 이후 다양한 의미들을 담아내는 의식으로 행해졌다. 때로는 회개의 행위였고, 성인에 대한 존경의 행위이기도 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복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예수님이 생활하시던 팔레스티나로도 순례하였고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로마로도 순례하였다. 8세기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신자들의 의무사항으로 받아들여졌다. 의무가 된 성지순례는 고통스러웠다. 머나먼 여행에서 신자들은 극기와 고행을 익혔으나 그것은 또 사람을 억누르는 짐이 되어 본질이 훼손되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성지순례의 전통은 급격하게 쇠하였다.

오늘날 순례의 전통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영성수련 행위로 자리잡았다. 이슬람교의 성지순례는 ‘하즈’라 불리며 일생에 한 번 메카를 순례하는 것이 신자의 기본적인 의무 가운데 하나이다. 순례기간 동안 이들은 금욕수행을 하며 규율에 따라 철저히 규제된 행위를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성지순례를 통해 고행수도를 하는 신자들을 볼 수 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본 티베트 불교 신자들의 삼보일배 순례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오체투지의 일이었다. 그 고통스런 순례를 가족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은 비로소 신비한 삶의 정점에 이른다고 했다. 그들의 순례길은 오래된 길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Southern Silk Road)이다. 중국 윈난성과 쓰촨성에서 시작하여 라싸의 조캉사원으로 이어지는 순례를 통해 그들은 온전한 신자의 행위를 마치게 된다.

내게 비친 순례자들의 모습은 그가 어떤 종교를 가졌든 신비하였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을 찾고 또 그곳을 걷고자 꿈꾼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한 길 ‘카미노’는 푸엔테를 출발하여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로 해마다 10만 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으로 모인다.

 

# 순례, 길에서 던진 질문

 

그들은 왜 산티아고까지 걸을까? 수많은 대답들을 아우르는 한 문장은 이것이다.

 

길에서 묻고자 떠난다.

그러므로 순례는 길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 <더 웨이(The Way)>는 명문 대학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어느 날 학업을 포기하고 순례자가 되어 떠난 뒤 폭풍을 만나 순례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펼쳐진다.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뒤 아들의 유골을 담은 함을 들고, 아들이 남긴 순례길 배낭을 멘 채 아들이 걸은 산티아고 길로 떠난다.

아버지의 질문은 간단하다.

 

왜 떠났을까?

아들은 왜 이 길로 떠나야 했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를 통해 비로소 그 대답에 이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수많은 질문을 가진 채 그곳으로 모여든다. 질문이란 그곳으로 오기까지 그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의 결과이다. 그들이 태어나 겪었을 파란만장한 일들, 그렇게 살아온 그들의 시간, 그것이 곧 순례길을 찾아온 이들의 질문이다.

여행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오는 깨달음이란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진리이다. 그들은 비로소 인생의 여정에서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온 사실을 깨닫는다.

순례길에서는 무엇보다 그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음이란 곧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더욱 신비한 것은 그렇게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일에 주목하게 된다.

‘톤즈의 꽃’ 이태석 신부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천국을 위해 일할 때 먹고 입는 것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다. 토리노에서 돈 보스코 신부가 수천 명의 아이들을 볼보고 있을 때였다. 돈 보스코는 빵 값을 갚지 못하여 여러 차례 외상값이 밀렸다. 빵집 주인은 화가 나서 더 이상 빵을 공급해줄 수 없다고 압박했다. 아이들은 이제 굶주릴 처지였는데, 바로 그날 어떤 사람이 돈 보스코에게 기도를 청하며 돈이 든 봉투를 건넸는데 그 돈의 액수가 꼭 밀린 빵값과 같았다고 한다. 돈 보스코가 그렇게 손님과 만날 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적은 우리에게 일상이 될 것이라는 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순례자는 먹고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내려놓음이 주는 자유로움은 순례자가 누려야 할 처음의 마음가짐이고 특권이다. 새가 창공을 날고 들의 꽃이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된 까닭을 발견하는 일이다.

꽃처럼 짧은 잠깐의 시간을 살아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가는가.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고 새보다 귀하다 하신 주님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제일 처음 배운 건 죽음을 대하는 태도였다. 죽음을 적이 아닌 친구로 대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죽음도 바로 옆에 있었는데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키스하겠다고 한다. 그럼 나는 오늘은 됐으니 기다리라 한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항상 의식하고 산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파울로 코엘료는 죽음에 대해 특별한 깨달음을 얻는다. 죽음은 오히려 우리가 오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순례자의 길에서 누리는 선물은 이처럼 우리 신앙의 깊은 데를 터치함으로써 가던 길을 멈추고 질문하게 만든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은 삶에 대한 갈망이다. 질문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질문은 결론을 얻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질문은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 더 사랑하고 진심으로 열정을 바치기 위해 추구하는 과정이다. 치열한 삶은 끊임없이 질문하는 삶이다.

순례는 그런 의미에서 길의 끝이 아니라 길의 시작이다. 산티아고를 걸은 사람은 인생의 산티아고에서 다시 순례의 삶을 시작한다. 그것은 그저 물리적인 길이 아니다. 순례자들은 순례의 길에서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고, 그 싸움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에 이른다. 순례는 안식으로 나아가는 투쟁의 길인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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