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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충청얘기(1)] 6.25때 딘소장 구하러 대전까지 기관차몬 김재현.현재영.황남호 기관사.: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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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충청얘기(1)] 6.25때 딘소장 구하러 대전까지 기관차몬 김재현.현재영.황남호 기관사.

신수용 대기자 | 기사입력 2020/04/29 [12:57]

【단독】[충청얘기(1)] 6.25때 딘소장 구하러 대전까지 기관차몬 김재현.현재영.황남호 기관사.

신수용 대기자 | 입력 : 2020/04/29 [12:57]

[세종경제= 신수용 대기자]지난 1950년 6.25동족상쟁의 비극당시, 당시 연기.공주지역의 금강전선이 무너지자 대전은  북한의 손에 넘어갔다.


대전은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경무대가 수도서울을 버리고 대전시 중구 대흥동 테미고개 충남지사관사로 옮겨왔고, 400m 떨어진 대전시 선화동 구 충남도청을 임시중앙청으로 썼다. 

그 바람에 대전이 3.8선 이북의 월남인과 충북. 서울. 경기,강원도의 피란민이 몰려 어떤 날은 300만 명의 도시가 됐다.

6.25 당시 대전지구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미 보병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구출명령을 받고 옥천에서 기관차를 몰고 대전역으로 온 대전철도국 김재현 현재영 황남호 기관사의 동상이 대전역에 세워져 있다[ 사진= 대전동구청 제공
6.25 당시 대전지구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미 보병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의 구출명령을 받고 옥천에서 기관차를 몰고 대전역으로 온 대전철도국 김재현 현재영 황남호 기관사의 동상이 대전역에 세워져 있다[ 사진= 대전동구청 제공

이때  남하하는 인민군이 수원에 이어 가장 치열한 전투는 이른바 연기.공주 금강지구 전투다. 이른바 한국전쟁사에는 공주- 대평리 전투로 기록되기도 했다.

여기에  참여한 부대가   미군 보병 제24사단이다.

인민군은 동두천. 의정부를 거처 서울.수원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전선을 확대, 연기.공주의 금강지구에서 월리엄 딘소장이 이끄는 미 보병24사단과 한국군이 합친 아군과 대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윌리엄 딘 사단장은 한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이자 당시 한국 지형을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각종 소련제 신형 기갑차와 기관포등을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 앞에 미 보병24사단과 한국군은 무너졌다.

고 윌리엄 딘 사단장은 한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이자 당시 한국 지형을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딘 소장은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전투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미국 포털사이트인 MSN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6.25 당시 금강및 대전지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미 보병 24사단장인 윌리엄 딘소장과 콜린스 미 참모총장, 그리고 워커중장, 북한에 생포된 뒤 북한방송, 그리고 3년6개월후 포로로 생활되는 모습[사진= 신수용 대기자. 연합뉴스]
6.25 당시 금강및 대전지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미 보병 24사단장인 윌리엄 딘소장과 콜린스 미 참모총장, 그리고 워커중장, 북한에 생포된 뒤 북한방송, 그리고 3년6개월후 포로로 생활되는 모습[사진= 신수용 대기자. 연합뉴스]

딘 장군은 후퇴하면서 아군 전선을 형성했으나 대전과 금산지구 전투에서  거듭 패퇴, 많은 희생과 함께 딘 장군은 부대와 홀로 떨어져 쫓기는 처지가 됐다.

몇 달을 홀홀단신 대전인근과, 충남 금산 대둔산등지에서 버티었다.

불행하게 그는 늦가을 무서리가 새하얗게 내린 날, 인근 옥수수밭에 들어가 굶주림을 달래려고  옥수수를 주어 먹다가 주민이 이를 보고 인민군에 신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이 생겼다. 

그는 미군 포로 중에 최고위급으로 인민군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전세를 높였다.

결국 윌리엄 딘 장군은 인민군에 끌려다니다가, 평양으로 이송해 수용소에서 3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뒤 6.25 종전후 포로교환때 미국으로 넘겨졌다.

딘 장군은 훗날 회고록등에서 한국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후퇴하다 부대와 이탈된 기간의 비참한 생활과 북한 수용소 참혹한 시련을 자세히 적었다.

6.25 당시 대전지구 전투에서 이긴 인민군들이 대전시내 동구 인동부근으로 들어오고 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6.25 당시 대전지구 전투에서 이긴 인민군들이 대전시내 동구 인동부근으로 들어오고 있다[사진=신수용 대기자 DB]

그러면서  당시 대전인근인 전라북도 금산의 어느 농가의 옥수수밭에서 허기를 달래려고 하다가 주민의 신고로 인민군에 잡힌 얘기속에 “자신들을 도우러 간 미국 장군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적에게 밀고하는 한국민이 평생 만난사람 중에 최고로 밉다. 그는 나를 공산군에게 신고하고 5달러를 받았다고 나중에 들었다. 다시는 한국에 가지도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믿지도 않겠다”고 크게 분노할 정도였다.  


얘기는 다시 돌아가 딘 장군이 행방불명이 되자 미국과 UN등 국제사회가 딘 장군을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송환을 요구했고, 포로로 대우하라는 성명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대전시가 인민군의 손에 들어가던 날인 1950년 7월19일 우리 정부는 은밀히  지령을 내렸다.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이날 이들은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들어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들어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 세분은 미 특수부대원 30명과 함께 기관차를 대전역까지 갔었다. [사진= 신수용 대기자Db}

김재현 기관사 등은 명령수행에 따라 딘장군을 구하기 위해 미군 결사대 30여명과 함께 충북 옥천에 멈춰있던  증기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다. 

28살의 김재현 기관사가 모는 기관차는 몇 백m도 못가서 산속에 매복된 인민군을 포탄과 총단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적의 기습으로 미군 결사대원 30명중 27명이 전사했으며 김재현 기관사는 전신에 총상을 입고 순직했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막내인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했다.

대전역까지는 많은 희생과 함께 도착했지만 딘 장군의 소재파악이 오리무중인데다, 전투장비도 미군들의 개인화기인 M1소총과 수류탄 몇 개정도 였다.

그러니 딘 장군 구출은 엄두도 낼 수 없다고 판단,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해 옥천역까지 퇴각했다.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6.25 당시 대전철도국 소속 김재현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부기관사에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들어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 세분은 미 특수부대원 30명과 함께 기관차를 대전역까지 갔었다. 당시 기관차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사진= 신수용 대기자Db}

전쟁이 끝난 뒤 미 국방부는 이들의 공로를 높이 기렸다. 워싱턴 포스트지나 뉴요타임즈지등에서 이 얘기를 당시 머릿기사로 실었을 정도 였다.

미국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민간인이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가장 훈격이 높은 공로훈장인 '특별민간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이를 계기로 1953년 10월23일 ‘한국이어려우면 미국이 돕고, 미국이 어려우면 한국이 돕는다’는 내용으로 혈맹관계인 한미우호조약을 맺게 됐다. 

또한 이같은 전사를 듣고 딘 장군도 마음을 돌려 한국민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풀고, 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에 참석도 했다.

전쟁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Bill Shin(신화봉) 기자의 특종기사를 실은 한 미국신문 지면.
전쟁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Bill Shin(신화봉) 기자의 특종기사를 실은 한 미국신문 지면. "딘 장군을 배반한 '가롯 유다'가 공산군으로부터 5달러를 받았다고 자백했다"는 제목이 붙어있다. (당시 원화로는 3만원을 받았다고 되어있는데, 딘 소장이 밝힌 당시 환율 860대 1을 적용하면 35달러 정도 되는 돈이다. 그런데 미국신문이 5달러로 보도한것은 잘못인 것 같다.)그들은 당시 전북 진안에 살던 한모(40세)와 최모(24세). 두 사람은 휴전 후 AP통신 한국인 기자 신화봉(Bill Shin)과의 인터뷰에서, 딘 장군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다가 인민군과 마주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군으로부터 각각 3만원씩(당시 미화 5달러 가치)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64년이 지난 오늘 이들을 새삼스레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북한군이 전라도까지 쳐내려오니까 ‘이제 공산당 세상이 되나 보다, 미군을 잡아주면 무슨 혜택이 돌아오겠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사진출처=블로그 realismhybrid 켑처]

김재현 기관사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됐다. 현재영 부기관사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6년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됐다. 


한편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김재현 철도 기관사와 현재영·황남호 철도 부기관사를 '2020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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