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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서학동 (2):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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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서학동 (2)

하얼빈의 안중근 (13)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4/28 [09:29]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서학동 (2)

하얼빈의 안중근 (13)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4/28 [09:29]
▲ 기념관에서 바라본 안중근의사 의거현장.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격폐(격살)한 곳'이라는 중국어 표지 아래 세모(저격위치)와 네모 (이토가 총 맞은 곳) 표시가 보인다.

기념관 관련, 비밀 유지에 최선 다해

서학동 부국장은 “개관 때까지 비밀을 지키라는 중국 외교부의 주문도 있었지만, 만약에 기념관을 만든다는 사실이 사전에 알려졌으면 (일본 등의 방해로) 공사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참고로 서국장은 이자리에서 ‘일본’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일본 등의 방해로’는 필자의 생각임.)
서 부국장은 지난 해 10월 한국 방문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조동성 관장을 만났을 때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또한 친형이 어느 날 “하얼빈역에 안 의사 동상을 세운다는데 맞느냐?”고 물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하얼빈 동포들 사이에는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 동상이 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한국에까지 전해졌었다.
서 부국장은 기념관을 만들어 온 사실을 한국 외무부에 개관 이틀 전인 1월 17일에 통보했고 기념관 간판은 개관 당일인 19일 오전 9시반에 걸었을 만큼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한 채 작업을 진행했다고 그간의 어려웠던 과정들을 소개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입구쪽에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등 안 의사의 주요 육필이 쭉 걸려있고 내부가 시작되는 천장에는 안의사 생애를 소개하는 짧은 동영상을 볼 수 있는 빔 프로젝트가 설치되어 있다. 그 다음 안 의사의 흉상을 시작으로 가정·교육·신앙, 애국운동과 구국교육실천, 의병투쟁과 단지동맹, 하얼빈에서의 열하루 등을 벽면에 사진 등과 함께 설명해 놓고 있다.

▲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 내부. 오른쪽에 안중근의사 흉상이 있다. 안 의사를 닮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그 다음 대형 유리창을 통해 플랫폼의 의거현장을 비스듬히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면 <안중근의사격폐이등방문사건발생지>[여기서 ‘격폐’는 ‘격살(擊殺)’ 즉, ‘쳐서 죽인다’는 한자어]라는 위치표시가 철길 앞 플랫폼 위에 잘 보이도록 걸려있고, 그 아래 세모(저격장소) 네모(이토가 총에 맞은 장소)표시를 볼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중국의 1급화가 권오송(權伍松)이 그린 <안중근격살이등박문(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쏴 죽인곳)>이라는 제목의 대형 의병투쟁기록화가 걸려있고 그 옆에 이토 히로부미 검시 기록 등이 붙여져있다. 이어서 여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최후의 유언, 동양평화론 등이 설명되어 있다. 주은래, 손문, 원세개, 장개석, 양계초, 장경국, 등영초 등 과거 중국 지도자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칭송한 글들도 작은 액자에 넣어져 게시되어 있다.

그런데 기념관은 바닥이 이중구조여서 입구쪽은 낮고 유리창 쪽은 조금 높았다. 여섯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되어있다. 나는 처음에는 기존의 건물안에 급하게 기념관을 짓느라고 원래의 바닥 구조를 고치지 못했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학동 부국장의 설명은, “의거 현장을 잘 볼 수 있도록 창쪽 바닥을 일부러 높였다는 것”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철로와 기차를 볼 수 있으므로 100년 전 기억을 더 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가.

서 부국장은 ‘유리창에서 거리가 조금 있어서 플랫폼 바닥의 세모와 네모가 잘 안보인다’는 지적에 대해 ‘잘 보이도록 앞으로 표지를 새로 붙일 것‘이라고 했다. 기념관 안의 흉상이 안 의사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하얼빈역을 새로 지을 계획이며 올해 시작할 예정인데 언제인지는 모른다고 하면서 역을 새로 지으면 안중근의사기념관도 더 잘 지어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는 수원대 박환 교수

그는 기념관의 우리말 표현이 (여순을 려순이라고 기록하는 등) 한국에서의 한글과 조금 다를 것이라면서 그 이유는 그곳이 중국에서 쓰는 기념관이므로 중국 조선족의 말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 부국장은 저녁자리에 함께 와있던 전 흑룡강신문사 사진기자이며 <대한영웅 안중근>이란 중국어로 된 안중근의사 일대기를 펴낸 이대무(李大武, 현 흑룡강성 예술연구소 연구원)씨를 의식한 듯 “이렇게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이대무씨 등 많은 분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동포들에 대한 감사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곳 흑룡강성 조선족 동포들은 1992년 안중근 오페라를 만들기도 하는 등 그간 안중근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그래서 이번에 짧은 기간에 그러한 기념관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 부국장은 기념관 개관 이후 전날(23일)까지 약 4개월 동안 5만여명이 관람을 했으며, 이 가운데는 한족이 60%, 한국인이 30%, 기타 외국인이 10%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하얼빈시 고위 간부답게 하얼빈 소개도 잠시 덧붙였다. “현재 1064만명이 사는 하얼빈시에는 과거에 유태인(유태계 러시아인인듯)들이 많이 산 영향으로 음악이 발달했다, 그래서 하얼빈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음악의 도시이며, 그러한 유럽 취향으로 인해 세계 2위의 맥주소비 도시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 과거 러시아가 조성했다는 하얼빈 중앙대가의 바이올린 등 악기 켜는 모습의 동상. 하얼빈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음악의 도시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라는 권유에도 내내 서서 말했다. 일행과 함께 이야기 한 시간은 20분 남짓 됐을까? 우리는 짧은 시간에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아쉬운 작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얼빈 출생의 조선족으로 1960년 5월 4일 생인 서학동 부국장(올해 54세)은 흑룡강성 물자직공대학과 흑룡강성 위당교 본과를 졸업하고 1994년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관장을 맡으면서 문화예술분야에서 창의력과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는 1995년 동북 3성 4만명의 조선족이 참여한 하얼빈시 제1회 조선족 민족문화축제를 개최해 이를 매 3년마다 열리는 정기적 행사로 만들었고 3회 때부터는 전국 행사로 확대했다. 2002년에는 중국에서 처음 열린 단일 소수민족 가요 경연인 제1회 조선가요콩쿠르를 개최했고, 2005년에는 하얼빈시 문화계통에서는 40년 만에 전국선진사업일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 부국장은 흑룡강성 제8기, 제9기 정치협상회의 위원을 역임했고, 문화예술 부문에 능력있는 간부로 중국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이번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 후 기념관에 관한 한 정부 대변인 역할도 하게 되어 국내외 많은 언론사들로부터 취재 요청을 받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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