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헤치며 헌병대로 달려가 밀고 조선 천주교의 수장 뮈텔(한국명 민덕효, 1854~1933) 주교는 눈이 많이 내리던 1911년 1월 어느날 황해도 청계동 성당의 빌렘 신부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안중근의 사촌동생 야고보(안명근, 1879~1927)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명근이 고해성사 때 빌렘 신부에게 한 이야기였다, 뮈텔, 자신의 일기에 안명근 밀고 사실 기록 뮈텔주교는 1911년 1월 11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 열흘 뒤인 1월 21일 일기.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고 최석우 신부가 24년(1984년부터 2008년)에 걸쳐 프랑스어로 쓰여진 뮈텔주교의 일기를 번역, 공개하기 전까지는 한일강제합병 다음해인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또는 신민회 사건)에 밀고자가 있었으며 그가 뮈텔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과거 대부분의 자료에는 “안명근이 간도지역에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는데, 민병찬 등이 이를 일제 헌병에게 제보함으로써 안명근이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고 되어있다. 이른바 안악사건이다. 안명근이 체포된 최초의 혐의는 '강도 및 강도 미수죄'였다. 그런데 뮈텔의 밀고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죄가 부풀려졌다. 일제는 안명근을 고문해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이를 빌미로 애국지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뮈텔이 아카시를 만나고 나온 이후 전국에서 600여명이 총독 암살미수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었다. 윤치호,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신채호, 이회영, 장지연 등 애국지사들이 대거 고문받고 투옥되는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던 것이다. 뮈텔 주교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에는 ‘자신은 안중근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그는 천주교인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던 인물이다. 이에 안명근이 뮈텔을 찾아가 빌렘신부의 여순행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다시 거부한다. 그래서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를 주기위해 여순에 다녀왔고 다녀 온 뒤 2개월 ‘성무집행정지(미사집전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국내 항일비밀결사단체였던 신민회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결국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뮈텔 등 당시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의 그러한 인식과 태도로 인해 국내 천주교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 참여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대표가 한 명도 없는 이유다. 뮈텔은 1919년 3.1운동 직후 천주교 신학생들을 만나고 난 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뮈텔의 인식에 대해 서강대 최기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안명근은 1911년 7월 22일,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 등’의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빌렘신부는 감옥의 안명근을 면회하기도 했다. 물론 안명근은 빌렘신부와 뮈텔주교의 그러한 짓을 알지 못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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