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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요: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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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요

김종우 | 기사입력 2014/03/20 [15:15]

그땐 그랬지요

김종우 | 입력 : 2014/03/20 [15:15]
“밥 좀 주세요~~~네?~~”
“삼층밥도 좋아요~~”
1950년대 거지들이 아침마다 가정집 앞에서 밥 동냥을 할 때 애절하게 외치던
멘트입니다.
6.25전쟁 이후 먹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습니다.
그 후 거지들은 점차 줄어들기는 했어도 걸인행각 금지법이 발효된 60년대 말까지
눈에 띄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시절에는 각설이 타령을 비롯한 각종 타령이 많고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각설이 타령은 먹는 문제가 가장 심각해서 생겨난 것이고 그밖에 타령도
한을 간직한 것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타령은 역사가 1500년 이상 됐다고 하지만
문자로 전해져 내려 온 것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
“내란 놈이 이래봬도 정승판서의 자제로써
팔도 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각설이라 역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지리고 지리고 돌아왔네~~”
이렇게 시작되는
품바타령 등 몇몇 개는 잘 보존돼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대에 알려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거지 타령도 있습니다.
“ 이질 코아비는 고비 똥에 설사, 망령 정치로 들어 간다… 됏! 됏! 됏!…”
“ 이리 칠, 저리 칠, 바지 안에 똥칠이나 개천동 “.. 
“물난봉 터진봉 개미허리 잘룩봉, 강 건너 무주봉, 해안에 모란봉” 
 “두리 두리 깡촌이라 개촌동~~
번개같이 주시면 벼락같이 받아서 귀신같이 사라지겠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냥 귓등으로 듣던 것들이 조금씩 생각납니다.
지금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실정을 대놓고는 말 못하고 빗대어 한 타령인 듯 싶습니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답게 내용도 듣기가 거북합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인정이 숨쉬고 있어서 동냥 온 거지들에게 따뜻한 밥 한술이라도
나눠 주곤 했답니다.
 거지를 비롯해서 가난했던 사람들이 주로 살던 곳이 바로
지금은 관광객과 데이트족이 즐겨 찾는 청계천 줄기였습니다.
청계천은 1971년도에 고가 도로를 설치하는 등 복개되었다가 2005년 9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 되었습니다.
 50년대 60년대 시내버스에는 여자 차장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차장 안내양은 힘도 세고 목소리도 우렁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버스가 터질 듯 많은 승객을 밀어 넣고 차체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 안 계시면 오라이잇~~” 하고 외치는 모습은 차라리 인간다운 삶의 몸부림
이었던 것 같습니다.
안내양이 큰 소리로 노선을 안내하던 모습도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 차라리 죽는게 나요~~ “
“ 차라리 죽는게 나요~~ “
청량리를 거처 중량교까지 간다는 것을 멋을 넣어 급히 부르다 보니까
“ 청량리, 중량교 가요” 가  “차라리 죽는게 나요~~” 처럼 들렸답니다.
지금은 미리 녹음된 안내양의 음성이 정류장마다 들리고 타고 내리는 것을
안내하는 차장도 없습니다.
그래도 질서 정연하게 잘 운행되고 있습니다.
세상 참 많이 변했지요.
 이 시절에는 밤 12시부터 새벽4시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 됐었습니다.
통금시간이 임박해오면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 찹쌀떡 사려~~ 메밀묵!”
늦은 밤 배가 출출한 사람들을 위한 먹거리 장사꾼의 삶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면 밤이 깊은 것입니다.
지금은 24시간 편의점이 동네마다 자리 잡고 있어 찹쌀떡 장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시절에는 소풍을 갈 때 단무지와 시금치 등을 넣은 긴줄김밥과
달걀 그리고 과일 몇 개와 칠성 사이다를 보자기에 둘둘 말아 싸가지고
갔답니다.
소풍을 가던 장소는 서울근교로 벽제, 서오능, 태능등 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요.
물론 수학여행은 경주나 부여였지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듣던 정감 있는 외침이 생각납니다.
“ 배고파 쇼빵 있어요~~ 목말라 쥬스~~~”
“ 심심풀이 땅콩 있어요~~ 예쁜 오징어~~”
홍익회소속 상인들이 열차 안에서 먹을 것을 팔기 위해 운과 박자를
맞추면서 외치던 소리였답니다.
열차가 터널을 지날 때면 미리 준비한 밀가루를 선생님 얼굴에 뿌렸지요.
그리곤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당황해하는 선생님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
했답니다.
그 때의 열차는 낮에 터널을 통과할 때 실내 조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장난이 가능 했지요.
그 시절에는 이런 철없는 장난이 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시절에는 장발이나 미니 스커트를 입은 젊은이도 풍기문란 사범으로 단속
했답니다.
공중전화 앞에서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줄을 서야 간신히 전화를 걸었던 시절
그 때는 앞사람이 별로 급하지도 않은 용무로 통화를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면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끊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는 동사무소에 가서 담뱃값을 쥐어 줘야만 남보다 먼저 각종 증명서를 떼
주었습니다.
그 시절, 그땐 그랬습니다.
지금은 속살을 내놓고 반바지 차림에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핸드폰이라는 것으로
전화하고, 문자하고 심지어 TV까지 봅니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습니다
자유분방한 것이 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설레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설레어지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마음이 들떠서 두근거리는 설레임은 우리의 희망이며 생명줄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살았던 사람이나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설레임의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설레임을 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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