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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출신이면서 자전거를 아직도 못타는 허당 문재인?

[잘 알려지지 않은 문재인 이야기 첫 번째] 문재인 캠프에서 공개한 에피소드

이승호 기자 | 기사입력 2017/02/23 [14:44]

특전사 출신이면서 자전거를 아직도 못타는 허당 문재인?

[잘 알려지지 않은 문재인 이야기 첫 번째] 문재인 캠프에서 공개한 에피소드

이승호 기자 | 입력 : 2017/02/23 [14:44]
 

18대 대선을 치른 문재인 전 대표에게 과연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가 있을까?

지난 대선은 사실 문 전대표가 자의적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출마한 것은 아니었다. '폐족이 된 친노그룹의 좌장격으로 '친구이자 주군을 잃은 입장에서 대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문 전대표의 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원로 멘토중의 한 분인 한완상 전 부총리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강권으로 결국 나섰고 안철수 후보와의 경합끝에 별안간 대선 후보가 됐다. 야권으로서는 질수 없는  선거였지만 당에서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정치권 속설처럼 권력의지가 없던 문재인은  '흙탕물같은 선거판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탄핵정국속에서 앞당겨질지도 모르는 대선 정국에서 4년만에 선거판에 복귀한 문재인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히말라야를 다녀온 후 눈빛부터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재인에 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워낙 과묵한 성격탓에 빈틈을 보이지 않고 개인적 스토리를 잘 털어놓지 않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스타일이었기때문이다. 문재인 캠프에서는 최근  공개되지 않은 문재인 후보와 관련된 에피소드, '잘 알려지지 않은 문재인 이야기'를 매일 3~4가지씩 언론에 공개하고 나섰다.


1.아직도 자전거를 못 타는 문재인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문재인 부모님은 1950년 흥남 철수 때 미군 선박에 몸을 실어 거제도까지 온다. 문재인은 그곳 거제도에서 태어난다. 함경도 지역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 시청 농업계장을 지내던 아버지가 피난지 거제도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포로수용소 노무일 말고는 없었다. 어머니도 어린 문재인을 등에 업은 채 계란을 떼어 부산까지 건너가 파는 고달픈 행상 일을 했다. 

이후 아버지는 장사를 시작했지만 잔뜩 빚만 지고 손을 털고 말았고 끝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가난은 어린 문재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돈 드는 일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내 자전거를 갖는 것은 고사하고 푼돈 내고 빌려 타는 것도 어려워 자전거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2.문재인의 동생 마도로스 문

문재인의 집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집안 단속을 철저히 하는 그의 고지식한 성격 탓일 것이다. 그의 남동생 문재익은 상선 선장, 즉 마도로스였다. 문재인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었을 때 문 선장은 지금은 없어진 stx에서 승선하고 있었다. 

형이 비서실장이 되자마자 stx는 문 선장을 해상직에서 육상직의 꽤 높은 자리로 직책을 변경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문재인은 문 선장에게 연락해 stx에 도움 줄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 테니 당장 바다로 돌아가라고 했다. 결국 동생은 형 등쌀에 다시 승선하게 된다. 

3.학교 때 별명은, 문제아

문재인은 과외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무난히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합격했다. 학교 때 그의 별명은 ‘문제아’였다. 물론 처음엔 이름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생기고 고 3때엔 술 담배도 했다. 또 소위 노는 친구들과도 어울리면서 폭넓게 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실제로 정학을 먹기도 했으니 정말 문제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는 3선 개헌 반대 시위, 학교를 병영화 하려는 교련에 대한 항의 등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슴에 담은 ‘정의파’라는 자의식이 더 강했다. 

4.호송차 구멍을 통해 본 어머니

경희대 법대에 4년 장학생으로 진학한 문재인. 당시 대학가의 유신반대 열기는 최고조에 달았다. 경희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회 총무부장이었던 그는 시위에 필요한 선언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이끌었다. 결국 그는 구속, 수감되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집에 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이 되도록 늦게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호송차의 동전만 한 구멍을 통해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구속을 뒤늦게 알고 급히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가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검찰청에서 우연히 호송차를 타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마치 영화 같은 그 장면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까지 보낸 자식이 포승줄에 묶인 모습을 목격한 어머니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아예 면회를 오지 않았다. 다행이 담당 판사의 소신 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 판사는 얼마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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