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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열차의 승객, 톨스토이: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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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열차의 승객, 톨스토이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20)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2/07 [11:34]

12번 열차의 승객, 톨스토이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20)

이정식 | 입력 : 2014/02/07 [11:34]

러시아 정교회와의 마지막 신경전

▲ 톨스토이의 무덤. 무덤 앞에 서있는 이는 소피야. 1912년 사진.

러시아 정교회는 9년 전 톨스토이를 파문했지만 그가 참회하지 않고 죽을 경우 교회에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만약에 톨스토이가 죽음에 임박하여 참회를 했다고 사람들에게 선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교회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정교회의 안토니 대주교는 수도원장 바르소노피 신부를 아스타포보로 파견해 톨스토이가 참회하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또한 정부에도 이득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은 당국과도 깊은 교감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오래전부터 정교회측이 자신이 죽기 전에 참회에 관한 전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일기장에 이를 경계하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내가 죽음에 임박하여 참회했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고안해 낼 것이다. 그래서 미리 밝혀 둔다.
교회로 돌아가 성찬에 참석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 --- 따라서 죽음을 앞둔 내가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은 모든 거짓이다.“

톨스토이의 그같은 뜻에 따라 톨스토이의 측근들은 아스타포보에 온 바르소노피 신부가 톨스토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오려는 것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정교회측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자신에 대해 쓴 부분을 제외한 신문의 주요기사들을 읽어달라고 했다. 관심을 끄는 기사는 오려서 서류 파일에 넣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병이 나으면 미래의 작품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소피야와 자녀들에게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11월 3일까지는 일기도 썼다.
그는 9년 전에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다. 당시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가스프라에서 장기간 요양 후 건강을 회복했었다. 그러므로 아스타포보에서도 회복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당국은 톨스토이의 친지들이 역에 머무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했다. 그러나 랴잔-우랄 선 철도 관리자였던 마트레넨스키 장군 같은 이는 아스타포보 역을 지나는 모든 기차는 기적 소리를 내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직위를 잃을지도 모르는 지시였다.
의사들은 러시아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위해 환자의 용태를 적은 메모를 하루에도 몇 번씩 문 앞에 걸어 놓았다.

불멸의 작품을 남기고 가출 10일 만에 영면의 세계로

그런데 11월 5일 밤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7일, 새벽 2시경부터는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맥박이 약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희미해졌다.
마코비츠키가 포도주를 탄 물을 톨스토이의 입에 대고 “레프 니꼴라예비치, 물을 좀 마셔봐요” 하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잠시 눈을 뜨고 물을 한 모금 마셨으나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임종이 임박해 보였다. 체르트코프 등 병상을 지키던 이들이 그제서야 소피야를 방에 들어오도록 했다. 새벽 5시쯤 가족들을 모두 방안으로 불렀다.
6시 5분, 가늘게 숨을 이어가던 톨스토이가 크게 마지막 한숨을 내쉬었다.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위대한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는 가출한지 열흘 만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국무회의는 이날 전원 기립하여 조의를 표했고, 의회도 이날 하루 휴회했다. 짜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가장 융성한 시대의 모습을 예술 작품에 묘사한 위대한 문호의 죽음에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카프리섬에서 망명중이던 막심 고리끼는 톨스토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위대한 영혼이 떠났다. 러시아 전체와 러시아적인 모든 것을 품었던 영혼이 떠나갔다" 고 애도했다. 

▲ 오졸린 역장의 집에서 나오는 톨스토이의 유해. 아들들이 운구하고 있다. (1910.11.8)

톨스토이의 유해는 이튿날인 11월 8일 기차로 야스나야 폴랴나로 운구되었다. 톨스토이가 마지막 부탁으로 자신의 관에 꽃을 바치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유해가 집으로 가는 길 곳곳에는 꽃을 들고 몰려든 애도객들로 붐볐다.
당국은 장례식이 반정부 시위로 발전할 것을 우려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야스나야 폴랴나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걸어서 야스나야 폴랴나까지 찾아왔다.
톨스토이의 장례식은 생전에 본인의 희망에 따라 종교적 의식 없이 거행되었다. 유해는 집 가까운 숲에 아무런 표식도 비석도 없이 묻혔다.

톨스토이가 임종을 맞은 아스타포보의 작은 방은 곧바로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방안의 모든 세간들을 비롯해 방의 모습들은 원형 그대로 남겨졌다. 위대한 인물이 마지막으로 머문 아스타포보 역에 딸린 이 방은 톨스토이를 따르는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백작이었던 톨스토이는 10월 31일 아스타포보 오졸린 역장의 방에서 의사 스토코프스키의 진단을 받을 때 의사가 진료 카드에 인적 사항을 적으면서 ‘지위’란 앞에서 잠시 멈추자,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12번 열차 승객이라고 적으십시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에서 승객들이 아닙니까? 다만 어떤 이들은 지금 막 자신의 기차에 오른 반면에 나 같은 이들은 내리는 것일 뿐입니다.”

진료카드에는 이름: 톨스토이 L.N, 나이: 82세, 지위: 백작, 12번 열차의 승객, 병명: 폐렴 으로 적혀있다.

한편, 톨스토이의 유언에 따라 출판과 문서에 대한 모든 저작권을 상속 받은 막내 딸 알렉산드라는 여기에서 생긴 돈으로 야스나야 폴랴나의 땅을 가족들로부터 사들였다. 알렉산드라는 그 후 집과 정원 등 일부만 어머니 소피야 앞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땅은 매각처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톨스토이의 생전의 소망이 그의 사후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집은 모스크바 시에서 사들여 1920년 이후 톨스토이 박물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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