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html on line 3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세종경제신문
로고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8)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1/18 [20:45]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8)

이정식 | 입력 : 2014/01/18 [20:45]

앞서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지에서 모범적인 삶은 살아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이들이 좋은 인상을 남긴 덕에 후에 시베리아로 온 정치범들은 간수들이나 현지 주민들로 부터 비교적 관대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데카브리스트들 덕에 자신과 같은 정치범들이 유형지에서 다른 죄수들에 비해 관대한 대접을 받았다고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베리아의 최고 사령관이 귀족 유형수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며, 심지어 평민 출신의 다른 죄수들과 비교해 볼 때 매사에 그들을 관대히 대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로, 최고 당국자들도 역시 귀족들이었다. 둘째는 이전에 귀족 출신 유형수들이 매질을 거부하고 집행자들에게 달려들어 이것으로 인해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주된 요인인 듯한 세번째 이유는, 약 35년 전쯤 갑자기 귀족 유형수의 거대한 무리가 시베리아에 나타났으며, 이 유형수들은 30년 동안 시베리아 전역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재평가 되었기 때문에, 당국은 이미 오래된 관습과는 무관하게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귀족 범죄자들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 419쪽)

▲ 바이칼 호수내 알혼섬의 강제수용소 접안부두 잔해. 지명은 뼤씨얀카. 이곳에는 소비에트 시절 수산물 가공소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생선인 '오믈' 가공소)가 있어 유형수들이 강제노역을 했다. 지금은 부두 흔적만 남아있다.

감옥에서의 마지막 무렵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동안에는 가족들에게 편지도 쓸 수 없었고, 성서외에는 책도 읽을 수 없었으나 출옥 전 얼마간은 그런 것들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이상스럽고 동시에 마음 설레게했던 느낌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마침내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마감하는 겨울이 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출옥을 기다리던 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겨울에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겨울에 들어온 것과 같은 날에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마침내 오래도록 기다리던 그 겨울이 온 것이다! 이따금 나의 가슴은 자유에 대한 커다란 예감 때문에 깊고 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말을 하는 김에 여기서 잠깐 지적하자면, 공상과 오랜 얽매임의 결과 때문에 감옥에 있는 우리들에게 자유는 현실의 자유, 즉 실제로 현실에서 누리는 자유보다도 왠지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죄수들은 현실적인 자유의 개념을 과장하였지만, 이것은 모든 죄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본질적인 것이었다. 어떤 다 헐어빠진 옷을 입은 병사라도 죄수들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거의 왕처럼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머리도 깎이지 않고 족쇄도 감시병도 없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453-454쪽)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침내 형기를 채우고 감옥을 나왔다. 감옥에서 나온후 그는 족쇄를 풀기위해 곧장 대장장이에게 가야했다. 대장장이는 그를 돌려 세우더니, 뒤에서 그의 발을 들어 올리고는 족쇄를 부쉈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457쪽)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된 것이었다. 또다시 4년간의 강제 군 복무가 기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54년 2월 중순 출옥하여 3월2일 시베리아의 세미팔라친스끄에 있는 제7대대에 사병으로 배치된다.
군에서 복무 중 1857년 간질 증세로 인해 군복무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1859년 3월까지 복무하다 38세 때인 1859년 3월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책을 읽는다. 감옥생활 중에는 성경 외에는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다.

그는 1855년부터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1862년에야 전체를 탈고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장르상으로는 <수기>에 해당된다. 작품 집필을 위해 감옥과 유형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었던 톨스토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여러 번 읽었고, ‘이것은 놀라운 작품이다’라고 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1866년 1월부터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1부와 제2부도 <러시아 통보>에 실리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당시의 제목은 <1805년>이었다. 두 작가는 이렇게 출판물에서 처음 만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으나 생전에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9편에 계속)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영상
이동
메인사진
무제2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