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html on line 3
시베리아의 전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3):세종경제신문
로고

시베리아의 전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3)

뒤마의 소설로 재탄생한 데카브리스트 부부의 사랑 이야기

이정식 | 기사입력 2014/03/09 [13:50]

시베리아의 전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3)

뒤마의 소설로 재탄생한 데카브리스트 부부의 사랑 이야기

이정식 | 입력 : 2014/03/09 [13:50]
▲ 시베리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예카테리나와 마리야가 살았던 네르친스크 블라고다츠크 광산마을의 오두막집

1827년 5월 황제가 바짐시에 온다는 것을 알고 뽈리나는 군중들을 뚫고 들어가 마침내 황제 앞에 도달해 무릎을 꿇었다. (이하 장민석씨 번역에서 인용 정리)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말을 잘 모르고, 결혼한 사이가 아님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려는 외국여성의 진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당신은 그곳에서 커다란 불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뽈리나는 황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뽈리나는 마침내 딸을 안넨코프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총독은 앞서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와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뽈리나는 굽히지 않았고 1828년 2월 드디어 안넨코프를 만났다.
동료들은 “그녀가 오지 않았으면 안넨코프는 정말로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1828년 4월 4일 치타에 있는 목조교회인 미하일-아르한겔스크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국은 결혼식 동안에만 안넨코프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이들은 1829년 딸 안나를 낳았고, 이듬해는 올가를 낳았으며 아들 블라지미르, 이반, 니콜라이 등 모두 18명을 낳았으나 단지 6명만 살아남았다.

뽈리나는 생기있고 활동적이며 근면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준비, 밭가꾸기 등 모든 일들을 했고, 귀족출신인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에게 농사 일, 바느질 등을 가르쳤으며 주변 사람들과 두루 편하게 지내면서 많은 이들을 도와주었다.

1839년 안넨코프의 군 복무가 승인되어 가족들은 따볼스크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856년 사면 때까지 살았다.
이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가서 20년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 살 때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가 찾아왔었다.
뒤마가 이들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쓴 소설이 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영화 (<매혹적인 사랑>)와 오페라 (<데카브리스트, 첫 편 ‘뽈리나 게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 뒤마에 대한 여러 자료에는 뒤마가 1840년 펜싱 마스터 아우구스틴 그리시에르와 함께 《펜싱마스터》를 출간하였다고 되어있다. 이 책은 그리시에르가 러시아에서 겪은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난의 경험담을 담고 있는데 뒤마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리시에르로부터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1840년이면 안넨코프 가족이 따볼스크에서 살 때이다. 뒤마는 1851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후 61년까지 10년간 러시아에서 살았다. 그 이전에도 러시아를 여러차례 여행한 것은 사실이나 펜싱마스터를 출간한 1840년 이전에도 안넨코프 가족을 방문했는지는 의문이다.)

뽈리나는 딸 올가에게 자신의 삶을 구술했다. 올가는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 1888년 책으로 출간하였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수호천사였던 알렉산드라

▲ 알렉산드라 그리고리예브나 무라비예바(1804~1832)

알렉산드라 그리고리예브나 무라비예바(1804~1832)는 데카브리스트 니키타 무라비예프의 부인이다.
1826년 10월 26일 당국의 승인을 받은 후, 어린 세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이 있는 시베리아로 떠난다.
알렉산드라는 떠나는 길에 모스크바에서 푸쉬킨을 만났는데, 푸쉬킨은 그녀에게 데카브리스트에게 증정하는 자신의 헌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Deep in Siberian mines)> 와 어릴적부터 절친했던 친구 지놋 푸쉰에게 보내는 편지 <나의 첫 번째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My first and best friend)>를 그녀에게 전했다. 푸쉬킨과 푸쉰은 푸쉬킨이 결투로 일찍 사망함으로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는 이후 발콘스키에게 전달되었다. 푸쉬킨은 짜르체제를 비판하는 시를 쓴 죄로 흑해지역에 추방되어 지낼 때 발콘스키의 부인이 된 마리야의 집에 드나들며 그녀와 가깝게 지냈는데 당시 푸쉬킨이 그린 마리야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 푸쉬킨이 그린 마리야의 초상화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
푸쉬킨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도
명예로운 인내심 높이 지켜라
그대들의 고통어린 노동과
마음의 분투는 헛되지 않으리니

불운의 충직한 자매, 희망은
지하감옥의 어둠속에 잠재되어 있으니
그녀는 깨어날 것이고, 그대는 기쁨에 뛰겠지
기다리던 그 날은 오리라

사랑과 우정이 어두운 속박의 문을 넘어
그대들에게 넘칠 것이오
내 자유의 목소리가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굴속까지 다다르듯이

무거운 사슬이 바닥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지리니
자유가 문에서 그대를 맞을 때
형제들이 그대에게 검을 건네주리라

(정리 : 이승호)

알렉산드라는 1827년 2월, 치타의 감옥에 도착해 무라비예프를 만났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에서 세 아이를 낳았지만 딸 소피야만 살아 남았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던 그녀를 자신들의 수호천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알렉산드라는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어린 아이들을 늘 그리워했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1832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뻬뜨로프스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살았던 뻬뜨로프스크 공장 터에는 그뒤 작은 교회가 세워졌다. (4편에 계속)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영상
이동
메인사진
무제2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