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위기의 한국! 지금 왜 다시 칭기즈칸인가˝
[세종경제신문 연재]조창완편집장의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그리고서 칭기즈칸은 들고 있던 말채찍을 땅에 떨어뜨렸다. 당시 몽골 사람들은 말채찍을 떨어뜨린 곳이 그가 죽으면 묻힐 곳이라고 생각했다. 칭기즈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수행하던 병사에게 말채찍을 그대로 잘 보존하라 명하고 아오바오(敖包)를 만들어 따로 표시하게 했다.
그런데 다음 해 칭기즈칸이 죽어 그의 영구차가 이곳을 통과할 때 진흙탕 길에서 바퀴가 구르지 않아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련(起輦 · 가마여 떠나자)!”이라고 소리쳤더니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바로 그 자리에 칭기즈칸을 묻고, 그곳을 ‘기련곡’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믿는 많은 몽골인은 칭기즈칸이 어얼둬쓰의 간더리 초원에 묻혀 있다고 주장한다.
한문을 배우지 않았던 칭기즈칸이 한시를 지었을 리도 없고, 무덤을 숨기는 매장 습관이 있으니 이곳은 중국의 판단대로 의관총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곳이 무덤으로서 주도권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40미터가량 솟은 낮은 구릉에 만들어진 칭기즈칸의 가묘는 몽골의 전통인 아오바오(敖包)를 따랐다. 몽골 지역의 구릉에는 어김없이 아오바오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서낭당과 비슷한 것으로, 몽골인들이 흙 · 돌 · 풀 등으로 쌓아 올려 경계나 이정표로 삼은 무더기다. 하지만 이곳의 기능은 다양하다. 먼 길을 이동할 때는 눈 밝은 몽골인들에게 이정표이고, 모여서 군사작전을 펴는 곳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본당까지는 700여 미터쯤 되는 적지 않은 거리였다. 말을 탄 칭기즈칸의 동상을 지나자 많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런데 계단의 양 옆에는 칭기즈칸의 명언을 새긴 99개의 조형물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글들을 읽으면서 칭기즈칸을 더 깊게 만났다.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칭기즈칸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방송한 CCTV 드라마를 보고 칭기즈칸에 관한 10여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허영만 작가의 명작 만화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도 한꺼번에 읽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칭기즈칸이야말로 제대로 된 노마드라는 것이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쪽으로 달렸다. 파키스탄의 중부에서 돌아왔지만,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지역까지 정벌했으니 그의 영토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동하는 데 익숙했지만 인재 등용이나 제도 정비 같은 노마드들이 갖춰야 할 자질도 완벽히 갖추고 실제에 사용했다.
노마드 학자 자크 아탈리도 그의 책에서 칭기즈칸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상상력으로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계인 유라시아의 최고권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성실하고 이해를 초월한 성격의 칭기즈칸은 전설과는 달리 파괴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부족들에게 문화적이고 과학적인 놀라운 발전을 가져온 인물이다. … 그는 20만에 달하는 기마병으로 조직된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 기마병들은 노마드적 전쟁을 치른 바 있는 기술자들로 … 그들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선전 효과만으로도 승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했다.”(자크 아탈리,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215페이지)
칭기즈칸의 책 가운데는 그의 진수를 뽑은 책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책들에도 대부분 칭기즈칸 사상이 가진 노마디즘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났던 칭기즈칸의 명언을 중심으로 그의 핵심사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어설픈 노마드로서의 삶을 살았다. 대학 4학년이던 1995년 가을, 기자로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다양한 일들을 했지만 글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1999년 가을 중국으로 떠나면서 내 글과 사고의 중심에는 중국이라는 요소가 굳건히 자리하기 시작했다.
현지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여론을 만들었고, 수많은 기고글을 통해 정보와 분석을 전달했다. 중국으로 간 2년 후부터는 방송을 통해 중국을 알리는 일도 했으니,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중국을 한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의 가장 큰 결과물은 13권으로 펴낸 중국 관련서일 것이다. 정보 중심의 여행 책이 많았지만 단순한 정보가 아닌 중국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여행을 제안했다.
그러다가 2008년 갑자기 귀국해 한신대 외래교수로서 가르친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강의를 통해 중국을 알리는 일을 했다. 2년 후에는 공직에 들어가 5년여를 중국 관련 업무를 봤다. 글을 쓸 기회는 적었지만 중국과 만나는 넓이와 깊이는 더 많아졌다.
그리고 2015년 10월에는 공직을 접었다. 2016년은 그냥 데면데면한 한 해일 수 있지만 나에게 가장 절실한 한 해 였다. 아무래도 이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도록 끊임없이 짖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문제에 관해 더 많은 생각을 던지고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게 내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중국에 기대고 산 이후부터 나는 중국에 관한 많은 예측을 했다. 황사나 미세먼지 같은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한중관계, 중국의 변화에 관한 예측이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비교적 맞아떨어졌다.
해마다 그해 황사가 얼마나 올지 예측해 글을 썼는데, 기상청이 인정할 만큼 정확하게 황사를 예측했다. 황사에서 현재 논란이 되는 미세먼지로 대상이 바뀐 후에도 나는 비교적 정확히 앞날을 예측했다. 권력의 부침이나 경제 등도 나름대로 큰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필자가 유일하게 잘못된 예측을 하였던 부동산 문제가 있지만, 이 문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정확히 맞추어왔다.
한국의 불안한 입지, 칭기즈칸에서 답을 찾자
그런데 이런 필자는 이번에 한국과 중국의 미래에 관해 가장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한국은 2016년을 기점으로 중국과 정치, 경제, 외교, 문화에서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세계 양대 강국으로 부각되어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고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간 발전에 안주해 전혀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해일이 닥치고 있는데 우리는 바닷가에서 물놀이에 정신이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런 위기를 국민들이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며 이 곤란을 풀어낼 카드도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에게 가장 깊이 다가온 인물은 칭기즈칸이었다. 역사의 수많은 인물 중에서 왜 칭기즈칸이었을까. 역사에서 중국을 상대로 해 승리한 인물이 몇 있다. 금 태조 아골타, 칭기즈칸, 청 태종 홍타이지 등이 그렇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필자가 칭기즈칸에 주목한 것은 그가 가진 인식이나 태도가 이 시대 한민족에게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여진족이 역사를 통해 중국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버린 반면 칭기즈칸의 몽골족은 조상들의 유훈을 지켜서 독립된 국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복잡하기 그지없는 한민족에게 앞날은 가시밭길과 같다. 그 열쇠를 칭기즈칸의 족적과 성숙해가는 말들을 통해 찾아갈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800년 전의 칭기즈칸과 함께 지금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도전정신과 의지, 그리고 철학과 노하우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나, 기업을 꾸려나갈 때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이강석, 정경채, 권희춘 공저, 『칭기즈칸 리더십』 중에서) [계속]
필자: 조창완
고려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미디어오늘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9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글, 방송, 저술 등으로 중국을 전했으며, 2004년에는 중국 전문 여행과 방송코디네이션회사인 알자여행(www.aljatour.com)을 창업, 운영하고 있다. 2008년 귀국 후 한신대 외래교수, 인민일보 특임기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0년 중국 전문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5년을 일했다. 현재는 알자여행 대표로 일하며, 중국 전문 잡지 ‘차이나리뷰’ 편집장을 겸하고 있다. 그밖에도 중국 전문 컨설턴트로 중국 투자 유치, 관광객 유치, 방송 등 콘텐츠 교류를 하며 전문 강사 등으로 뛰고 있다.
대표작: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 『차이나 소프트』, 『베이징을 알면 중국어가 보인다』, 『오감만족 상하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달콤한 중국』 등 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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