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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기록한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세종경제신문

안중근 의사가 기록한 이토 히로부미의 최후

2015-02-10     김근식 칼럼니스트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모형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거사 후 여순 감옥에 있을 때인 1909년 12월 13일부터 사형집행 열하루전인 이듬해 3월 15일까지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썼다.

그러나 '안응칠 역사'는 일제에 의해 꼭꼭 숨겨져 소문만 있었을 뿐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일제는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후 시신을 현지에 있던 안 의사 동생들(정근, 공근)에게 인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안 의사가 집필한 ‘안응칠 역사’도 주지 않았다.

그러던중 1969년 겨울 도쿄의 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된 프린트 본이 처음 발견된 이후 1979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비록 안 의사의 친필 한문 원고는 아니나마, 베낀 원고 전문이 발견되어 '안응칠 역사'의 자세한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음은 '안응칠 역사' 중 하얼빈역 의거 당일의 기록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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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1909년 10월 25일),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양복 한 벌을 갈아 입은 뒤에, 단총을 지니고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그곳에 이르니, 러시아 고관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나는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하며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니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용솟음치고 3천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이같이 천지를 횡행하고 다니는데 어질고 약한 우리 민족은 왜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울분을 참으며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그자가 정말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나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다시 뒤쪽을 보니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 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만일 무관한 사람을 쏘았다면 일을 어찌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나를 체포하니 그때가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 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헌병대로 붙잡혀 갔다.
검거된 뒤 러시아 검찰관(檢察官)이 대한인 통역과 함께 와서, 성명과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살며 어디로부터 와서 무슨 까닭으로 이토를 해쳤는가를 물으므로, 대강을 설명해 주었으나 통역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사진을 찍는 자가 두서너 명이 있었고 오후 8시쯤 러시아 헌병장교가 와서 함께 마차를 타고 일본영사관에 이르러 나를 넘겨주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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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에 의해 여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최서면 선생은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자신의 최후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유해 매장장소의 작은 단서라도 찾기위해 애쓰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최서면 선생은 올해로 89세의 고령이다. 최 선생 생전에 과연 유해발굴은 이루어 질 것인가? 그것은 최 선생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바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