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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된 소설가 - 도스토옙스키 ④ 그가 사형수가 된 이유:세종경제신문

사형수가 된 소설가 - 도스토옙스키 ④ 그가 사형수가 된 이유

2020-03-26     이정식 대기자
독서모임을 주도한 페트라셰프스키 [이정식 대기자]
독서모임을 주도한 페트라셰프스키 [이정식 대기자]페트라셰프스키 독서 모임그후 도스토옙스키는 27세 때인 1848년부터 외무부 관리 페트라셰프스키 집의 독서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페트라셰프스키를 처음 안 것은 1846년이었다.페트라셰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외무부에 근무하는 관리였는데 자기 집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J. Fourier, 1772-1837)를 연구하는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 모임은 점차 체제 비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전제정치와 농노제도의 문제점 등이 중요한 토론 주제였다. 경찰은 이 블온한 모임을 예의 주시했고 여기에 안토넬리라는 대학생을 스파이로 잠입시켰다.안토넬리는 모임의 구체적 내용을 소상하게 상부에 보고했다. 마침내 경찰은 그 보고를 토대로 독서모임의 참석자들을 일망타진하기로 결정한다. 경찰은 1849년 4월 22일과 23일 회원 34명을 전격 체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23일 새벽에 자다가 체포되었다. 그의 형 미하일 동생 안드레이도 체포됐으나 형과 동생은 가담정도가 경미하다고 하여 풀려났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정치범들을 가두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혔다.수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9월부터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았다. 11월 13일,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21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됐다. 도스토옙스키도 여기에 포함됐다.당시 페트라셰프스키 모임 참석자들은 심각한 반체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국은 이들을 엄벌함으로써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차르 니콜라이1세의 생각이었다.도스토옙스키의 죄는 그가 체포되기 직전인 4월 15일 모임에서 당대의 유명 작가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벨린스키(1811-1848)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이다. 벨린스키는 이미 한해 전에 고인이 되었지만, 벨린스키가 생전에 쓴 그 편지는 전제주의를 신봉하는 입장을 나타낸 고골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이다. 이는 바로 차르체제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당국은 그 편지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전파를 금하고 있었다.그렇다면 왜 그 편지가 그처럼 문제가 되었는가?. 고골은 『검찰관』, 『외투』,『죽은 혼』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작가였다. 특히 1836년에 초연된 희곡 『검찰관』은 러시아 관료 사회의 속물성과 부패를 유쾌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불멸의 코믹 풍자극이다.고골 흉상(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정식 대기자]

푸시킨(1799-1837)보다 10년 아래였던 고골은 한때 푸시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1837년 푸시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한 후에는 러시아 문단의 주역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런데 30대 후반부터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았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47년 『친구들과의 서신교환 선(발췌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그의 정치적, 종교적 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전까지 그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로 알았던 지식인들은 책으로 묶여 나온 그의 이 편지 모음집을 보고 충격과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당대 러시아의 커다란 문제로 생각했던 차르체제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농노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가령 군주체제와 관련해 고골은 당시 문단의 대선배인 주콥스키(시인, 1783-1852)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군주란 궁극적으로 그 전 존재가 하나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민족 전체가 본능적으로 인정하듯 누구나 군주란 곧 하느님의 다른 모습임을 분명히 알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함으로써 군주의 숭엄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친구와의 서신교환선』, 니콜라이 고골, 석영중 옮김, 나남, 2007)

‘군주란 곧 하느님의 다른 모습’이라고까지 아첨한 이 책이 발간되자 러시아의 문단과 독자들은 고골이 기대를 배신했다며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마침내 벨린스키는 고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공개서한인 <고골에게 쓴 편지>를 발표한다. 벨린스키는 고골의 그 책은 “진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며 “(그의 책에서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죽음과 악마와 지옥의 병적인 공포의 냄새가 난다.”고 비난했다. 벨린스키는 이 편지를 쓴 다음 해인 1848년 37세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듬해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이 발생했다.

고골의 책은 차르나 정교회, 귀족과 지주들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단에서 고골의 입지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고골은 그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적으로도 이상 상태가 되어 1852년 단식으로 생을 마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