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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된 소설가 - 도스토옙스키③ 첫 작품의 성공으로 우쭐하다:세종경제신문

사형수가 된 소설가 - 도스토옙스키③ 첫 작품의 성공으로 우쭐하다

2020-03-26     이정식 대기자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일했던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구제병원 [이정식 대기자]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가 일했던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구제병원 [이정식 대기자]3일후 이들의 안내로 벨린스키를 만났을 때 벨린스키는 “자네가 쓴 것이 무엇인줄 아는가?...자네 나이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을텐데.”라며 그의 소설을 극찬하고, 무한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최고의 비평가의 찬사에 한껏 우쭐해 했다. 그는 벨린스키와 교류하면서 유명작가 투르게네프 등도 알게 되었다.도스토옙스키는 1845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발표한 후 다음해인 1846년 12월 『분신』을 내 놓으면서 더 큰 찬사를 기대했으나 반응은 냉냉했다. 찬사는 커녕 혹평을 받았다. 벨린스키도 ‘사람을 잘못 본 것 아닌가’했고 이후 벨린스키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벨린스키는 1848년 5월에 사망했다.물론 벨린스키와 멀어진 것은 단지 작품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 이 호평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이 보이자, 자신이 다른 신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꽤나 들떠있었던 것 같다.그는 당시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경이로움으로 바라보고 있다면서, 자신의 성공을 전하려면 종이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정도”라고 썼다.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문단의 선배인 파나예프(1812~1862)의 집에도 드나들었는데 그의 부인 파나예바는 후일 그녀가 쓴 『문학의 추억』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마르고 작은 키에 병자같은 모습이었다”며 “그는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고 보라는 듯 우쭐대고 있었다”고 썼다. (* 파나예프 부인 파나예바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도스토옙스키는 파나예바를 좋아했다)이같은 도스토옙스키의 다소 건방져 보이는 태도는 주위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벨린스키, 투르게네프 등과의 관계가 소원해 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계속)26세 때의 도스토옙스키 [이정식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