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명을 듣다가, 까쩨리나 양에게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사병 신분임에도 마리야 아들의 가정교사로 그집에 드나들다가 마리야와 애정관계에 빠지게 되었다는 일부 기록(고바야시 히데오의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병영생활을 하는 사병이 가정교사를 하러 민간인집에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정황상 맞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까쩨리나 양은 도스토옙스키가 가정교사를 했던 것은 아니며, 벨레호프란 장교의 소개로 이사예프 부부를 알게 된 것이 마리야를 사귀게 된 계기였다고 했다.
마리야보다는 도스토옙스키쪽에서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던 중 이사예프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동북쪽으로 6백킬로나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되어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자, 도스토옙스키는 충격을 받고 어쩔줄 몰라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는 브랑겔 남작의 회상록에 나온다. 마리야는 체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마리야가 떠나자 도스토옙스키는 잠도 잘 못자고 음식도 잘 먹지 않아 체중도 줄어들었다. 노상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만 빨아대며 지냈다.
마리야가 떠난 후 유령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
브랑겔 남작은 마리야가 떠난 후 낙담하여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몸도 쇠약해져 유형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를 한번 만나기라도 하면 불행한 상태가 나아질까하여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하고 작전을 짰다.
처음에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지사와 연대장에게 세미팔라친스크와 쿠즈네츠크의 중간쯤에 있는 즈미예브(현재의 지명은 지메이노고르스크)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탄원을 하도록 했으나 두 번이나 거부되었다. 결국 모험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몇 번이나 일으켜 아파 누워있다는 소문을 온 마을에 퍼뜨렸다. 당시 세미팔라친스크의 인구는 2~3천여명에 불과했으므로 소문은 금방 퍼졌다. 도스토옙스키는 연대장에게 군의관 라못테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고하는 한편으로 쿠즈네츠크로 마리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즈미예브에서 만나자고 했다. 군의관 라못테는 폴란드 출신인데 그도 정치적인 처벌로 세미팔라친스크에 와 있었다. 즈미예브 상봉 계획도 실은 군의관의 아이디어였다고 브랑겔은 후에 술회했다.
어느날 해가 진 후 밤 10시쯤 도스토옙스키와 브랑겔은 몰래 마차를 타고 세미팔라친스크를 떠났다. 마부에게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도록 했다. 마차는 최대 속도로 달렸으나 맘이 급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줄곧 마부에게 더 빨리 달려달라고 재촉했다. 마침내 즈미예브에 도착했으나 마리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로부터 남편의 병세가 중하고 여비가 없어 오지 못한다는 편지가 도착해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크게 실망했다. 브랑겔은 실망해 넋을 잃고 있는 도스토옙스키를 위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날 두 사람은 다시 3백킬로미터를 28시간 만에 달려 세미팔라친스크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들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