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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개' 간신의 놀음에 정권이 멸망하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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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개' 간신의 놀음에 정권이 멸망하다!

[송교수와 함께 떠나는 중국 역사여행]독사닉관(讀史搦管)제3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송철규(한중대교수.세종경제신문 자문위원) | 기사입력 2017/01/20 [13:54]

'화사개' 간신의 놀음에 정권이 멸망하다!

[송교수와 함께 떠나는 중국 역사여행]독사닉관(讀史搦管)제3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송철규(한중대교수.세종경제신문 자문위원) | 입력 : 2017/01/20 [13:54]
▲ 중국 CC TV 드라마 '화사개', 그는 중국의 대표적 간신 중 한명이다. 사진=중국 TV 자료사진

송철규교수(세종경제신문 자문위원)의 독사닉관(讀史搦管)

 새해를 맞아 중국 역사를 둘러보고 느낀 소감을 우리 시대에 되새기며 독자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세종경제신문에 연재를 시작한다. 이 코너의 이름인 ‘독사닉관’(讀史搦管)는 말 그대로 ‘역사를 읽고 붓을 잡다’이다. ‘닉관’은 또 ‘피리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다’는 뜻을 갖는다. 독자들께서는 필부의 혼잣말이라 여기시고 더불어 옛날이야기를 즐겨주시기 바란다.

제3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다

  화사개(和士開, 524~571)는 북제(北齊) 세조인 고담(高湛)의 신하로 간교함과 능란한 언변으로 중국사에서 대표적인 간신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는 주요 직책에 있으면서 일부 관리들과 결탁하여 뇌물을 챙겼고, 황후인 류씨(類氏)와 정분을 나누었다.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고담도 개의치 않고 그를 총애하였다. 고담은 화사개가 국정을 대신들에게 맡기고 유흥을 즐기라고 권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568년, 고담은 술과 약물 중독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고담이 죽자 어린 태자(後主)가 즉위하였고, 류태후가 화사개의 도움을 받아 섭정에 나섰다. 오래지 않아 종친인 조군왕(趙郡王) 고예(高睿)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류태후와 화사개의 농단을 참지 못하고 화사개의 비리를 지적하며 축출을 요구하였다.

중국의 대표적 간신 화사개

 류태후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류태후는 할 수 없이 화사개를 곤주자사(袞州刺史)로 강등시켰다. 단 세조 고담의 장례식이 완전히 끝난 뒤에 부임하는 조건을 달았다.

 장례가 끝난 뒤 신하들이 화사개 축출을 재촉하자 류태후는 100일을 더 머물도록 조치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기세에 밀려 그의 출행을 명하였다.

부임하는 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화사개는 밤새 고심하다가 위기를 모면할 방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4명의 미녀와 진주로 만든 발(珠簾)을 들고 류정원(類定遠)을 찾아갔다. 류정원 역시 화사개의 축출을 주도했던 신하였다.

 류정원을 만난 화사개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모든 권세가들이 저를 죽이려 했으나 공께서 도와주셔서 목숨을 부지하고 자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임지로 가기 전에 공에게 4명의 미녀와 주렴을 드림으로써 감사를 표하려 했습니다.”

류정원은 뜻밖의 선물에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아직도 조정에 머물고 싶소?”

그러자 화사개가 대답했다.

“소신이 생각건대 지금 조정에 남는 것은 불안합니다. 더 이상 조정의 자리에 욕심이 없으니 오랫동안 지방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셨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류정원은 화사개의 개인적 청탁이라 여기고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화사개는 류정원의 집을 나서며 문 앞에서 말했다.

“이제 곧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 전에 폐하(後主)와 태후를 알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사개와 류태후의 관계를 알고 있던 류정원은 별다른 의심없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주군과 태후를 만난 화사개는 통곡하며 말했다.

“선제의 총애가 깊었는데, 이제 가시고 없으니 선제와 함께 묻히지 못함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조정 대신들은 저 하나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손발을 묶어 국정을 장악하려는 속셈입니다. 조정에 곧 큰 변고가 있을텐데 폐하와 태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소신은 선제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류태후와 후주는 화사개의 언변에 놀라 통곡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었다. 그러자 화사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소신도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먼저 몇 통의 조서를 꾸며야 합니다.” 류태후와 후주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화사개에게 향후 조치를 일임하였다.

조정의 모사꾼 화사개 음모에 충신들 줄줄이 좌천,피살

화사개는 조서를 꾸며 류정원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좌천시키고, 자신의 퇴출을 주장했던 많은 신하들에게 보복성 인사를 단행하였다. 문무백관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줄곧 화사개의 퇴출을 주장했던 조군왕 고예는 이런 조치가 부당함을 항변하기 위해 조정을 찾아갔지만 류태후의 지시로 궁중에서 살해되었다.

류정원은 자신이 화사개의 농간에 놀아났음을 깨닫고 그가 자신에게 주었던 4명의 미녀와 주렴은 물론 집안의 모든 패물을 뇌물로 되돌려줌으로써 개인적인 화는 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세치 혀로 온갖 위기를 다 이겨낼 것 같던 화사개도 571년 낭야왕(琅琊王) 고엄(高儼)과 호 태후의 매부 풍자종(馮子琮)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의 피살소식이 전해지자 낙양의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북제는 폭군(暴君)과 암군(暗君)이 꼬리를 이었고 그 주위에는 언제나 간신과 아첨꾼들이 넘쳐났다. 결국 이들 세력 간의 암투로 내부로부터 붕괴하여 577년 북주(北周)에게 멸망하였다.

 화사개도 화사개지만 그의 언변에 농락을 당한 후주와 류정원 등의 인물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개인의 신분이 아닌 국정의 중심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 위해가 더욱 심각하였다.

이런 비참한 역사가 내 나라 내 땅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양화가 양화를 선도하는 선순환구조가 사회 전반에 속히 정착되기를 기도한다.

송철규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 문학박사 / 현재 한중대학교 교수

 중국의 문화를 다방면으로 깊이 있게 소개하기 위해 저술과 양서 번역에 힘쓰고 있으며 이번에 세종경제신문에 현재의 정국과 관련하여 중국의 여황제 '무측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스토리를 파는 나라, 중국>, <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전 3권), <경극>, <현대 중국의 연극과 영화>(공저), <논어>, <사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제갈공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묘수>, <묵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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