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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황제 무측천의 권력욕과 문무백관들의 굴종'[송교수와 함께 떠나는 중국 역사여행 독사닉관(讀史搦管) 제1화 물길 따라 배를 밀다(順水推舟)
송철규(한중대교수)  |  yind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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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11  01: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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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최초의 여황제 무측천(武則天)

송철규의 독사닉관(讀史搦管)

 제1화 물길 따라 배를 밀다(순수추주順水推舟)

 새해를 맞아 중국 역사를 둘러보고 느낀 소감을 우리 시대에 되새기며 독자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이 연재를 시작한다. 이 코너의 이름인 ‘독사닉관’(讀史搦管)는 말 그대로 ‘역사를 읽고 붓을 잡다’이다. ‘닉관’은 또 ‘피리와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다’는 뜻을 갖는다. 독자들께서는 필부의 혼잣말이라 여기시고 더불어 옛날이야기를 즐겨주시기 바란다.

중국의 여황제 무측천의 인생

 무측천(武則天:통상 발음을 따른다, 본명은 무조이고 무미랑武媚郞으로 불림)은 인구에 회자되는 중국 역사 속의 여황제이다. 그녀는 본래 당 고종의 첩이었다.

고질적인 두통을 앓았던 고종은 660년부터 국정의 상당 부분을 무미랑에게 맡긴 채 개인의 양생(養生)에 주력하면서 무미랑은 점차 권력을 키웠다. 683년, 고종은 두통이 재발하여 치료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황위를 계승한 중종(中宗) 이현(李顯)은 국정을 주도할 능력이 없어 모든 국정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인 무미랑이 장악하게 되었다.

 무미랑은 실권을 장악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전면에 나서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여성이 황제에 오른다 함은 전례 없는 일로서 당시 정서로는 용납할 수 없는 괴사(怪事)였다. 이후 중종이 폐위되자 무미랑은 속내를 감추고 주위 관료들에게 후임자 선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재상을 비롯한 많은 관료가 고종과 무미랑 사이의 막내아들인 예왕(豫王) 이단(李旦)을 추천하였다. 무미랑을 거론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섣불리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말아야함을 크게 깨닫고 일단 예왕 이단을 황위에 앉히니 그가 예종(睿宗)이다. 그런데 예종이 즉위하자 많은 관료들이 여전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종을 황제로 받드는 것이었다.

심지어 장수 이경업(李敬業, 원래는 서씨徐氏)은 10여만의 군사를 모아 무미랑 타도를 주장하였고, 문인 낙빈왕(駱賓王)은 그 유명한 <토무격문(討武檄文)>을 써 무미랑의 집권 야욕을 비판한 뒤 이경업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이경업의 군대는 패하였고, 낙빈왕은 실종되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많은 지역에서 무미랑의 집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무미랑은 섣불리 황위에 오르면 백성의 지지는커녕 역사에 오명을 남길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민심을 바꾸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먼저, 황위에 있는 이단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황위를 인계하겠다는 글을 쓰도록 종용하여 자신이 할 수 없이 황위에 오르는 상황을 유도하였다. 다음으로, 조카인 무승사(武承嗣)에게 사람을 시켜 돌에 ‘성모가 강림하니 제국의 영원토록 번창하리라(聖母臨人, 永昌帝業)’이란 글을 붉게 새겨 낙수(洛水)에 빠트린 뒤 옹주(雍州) 사람 당동태(唐同泰)에게 그것을 꺼내와 조정에 바치게 하였다.

무측천은 남쪽 교외에 나가 신령께 제사를 드리며 그 돌을 ‘수성도(授聖圖)’라 일컫고 낙수를 ‘영창수(永昌水)’로 명명하였다. 또한 낙수의 신을 ‘현성후(顯聖侯)’에 봉하고 자신을 ‘성모신황(聖母神皇)’이라 칭했다. 이로써 자신이 황제가 됨은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내세웠다. 이 일을 도운 당동태에게는 장군의 직위를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암암리에 승려 법명(法明)에게 <대운경(大雲經)> 4권을 써서 조정 안팎에 뿌리도록 하였다. 그 책속에서 무미랑은 미륵불의 현생으로 미화되어 당 왕조를 통치함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그려졌다. 무미랑은 관리들을 시켜 백성들에게 읽히도록 강요하였고, 그 책을 보관하는 전문 수장고를 짓기까지 하였다.

문무백관들 대세를 직감,무미방 황제 즉위 협조 

 마지막으로 시어사(侍御史) 부유예(傅游藝)에게 900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조정에 와 무미랑의 황제 즉위를 간청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시켰다. 정작 자신은 즉각적인 답을 미루면서 부유예를 급사중(給事中)에 진급시켰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문무백관은 대세를 직감하고 부유예의 뒤를 좇았고, 상소문을 올린 사람도 6만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여론을 형성한 무미랑은 민심과 천의에 따른다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문무백관도 물길 따라 배를 민다고 무미랑의 황제 즉위를 간청하였고, 예종 이단도 자신이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기며 직접 글을 써 성을 무씨로 바꿨다. 이리하여 무미랑은 대세를 만든 뒤 황위에 올랐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황제이고 떠도는 외사(外史)들이 많아 평가가 분분하다.

그런데 권세를 키우고 황위에 오르는 과정이 1,400년 전의 일같이 않다고 느껴짐은 왜일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도 하고, 사람이 자리를 만든다고도 한다.

그런데 자리는 누가 담당하느냐에 따라 좋은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나쁜 자리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자기가 고생하여 이 자리에 올랐으니 자리가 가진 힘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여기면서 자리가 가진 의무는 소홀히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즉, 자리가 사람을 키우기도 하지만 망치게도 한다. 또 한편으로 사람이 자리를 만들 때 좋은 자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나쁜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2017년은 리셋코리아의 해이다. 대한민국 재정립의 해이다. 자리가 사람을 키우는 사회, 그리고 좋은 자리를 많이 만드는 사람이 나오는 사회를 다시 세우는 한 해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 ‘물길 따라 배를 밀 수 있는(順水推舟)’ 우리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송철규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 문학박사 / 현재 한중대학교 교수

 중국의 문화를 다방면으로 깊이 있게 소개하기 위해 저술과 양서 번역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스토리를 파는 나라, 중국>, <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전 3권), <경극>, <현대 중국의 연극과 영화>(공저), <논어>, <사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제갈공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묘수>, <묵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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