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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담을 수만 있다면 세계가 네것이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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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담을 수만 있다면 세계가 네것이다"

세종경제신문 연재⑧]조창완편집장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칭기즈칸 키워드,'사상의 개방과 비전'

조창완(차이나리뷰 편집장) | 기사입력 2017/01/09 [02:30]

칭기즈칸,"담을 수만 있다면 세계가 네것이다"

세종경제신문 연재⑧]조창완편집장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칭기즈칸 키워드,'사상의 개방과 비전'

조창완(차이나리뷰 편집장) | 입력 : 2017/01/09 [02:30]
▲ 광활한 몽골의 초원 사진=몽골 이호기자

“몽골의 핵심사상은 다원이다.”

“한 국가, 민족을 정복하는 것은 그들의 언어를 정복함만 못하다. 자기를 알고 적을 알면 너는 영원히 이길 수 있다.”

“내가 몽골인을 데리고 중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본래 민족의 언어를 전파할 의도가 없다. 명심하라.”

 칭기즈칸은 몽골의 법률이자 헌법인 대자사크를 만들어 통치했다. 이 속에 “모든 종교는 차별 없이 존중해야 한다”는 말과 더불어 “승려 · 법관 · 의사 · 학자에게 조세를 받거나 부역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몽골지역은 전통적으로 샤먼인 당골을 섬겼지만 불교, 기독교, 이슬람, 도교 등이 공존했다. 이 때문에 몽골 시기에 상인이나 학자들은 동서양을 마음대로 넘나들었고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은 문화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보통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면 종교는 물론이고 언어까지도 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다원성에 그 중심을 맞추고, 각자의 것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중국 지배 몽골, 문화 존중

만약 원나라가 중원에 들어가 몽골의 언어를 대륙에 주입하려 했다면 그 성공 가능성도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한족 문화에 흡수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다원성 그 자체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고, 지금도 몽골은 자기의 다양한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다.

노마드는 다원성의 인정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사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덜했지만 조선의 유교는 성리학을 절대 사상으로 받아들여 일체의 다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같은 유학의 일파인 양명학조차 거부했다. 근대 이후에 기독교가 들어와서도 비슷했다. 한국 기독교의 폐쇄성은 유명한데, 유일신 사상을 철저히 따라 일체 다른 종교를 배척했다.

그런데 노마드에게 이런 유일신 신앙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또 결국 수많은 사상과 사람을 만나다 보면 폐쇄적인 사람은 결국 자기 세계의 축소를 가져 올 수밖에 없다.

당대를 위협하는 최악의 문제는 이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지하드(Jihad, 이슬람 성전주의자)’다. 뉴욕 9.11 사태를 시작으로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국가 전역을 위협하는 지하드는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공격이나 비하 등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지하드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으로 같은 이슬람인들에게조차 비난받는다. 하지만 그 원인에 기독교 등 여타 종교의 이슬람 공격이 없다고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팽배하면서 기독교 역시 신뢰를 잃기는 마찬가지다. 서구에서부터 종교는 그 가치를 잃었다는 평가가 팽배하고 있다. 종교가 기득권자를 옹호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는 젊은층은 종교를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천주교는 2005년 이후 사제 수가 이전 시기의 1/3 정도 늘어나는 데 그쳤다고 본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대형교회를 제외한 일반 교회에는 청년부가 사라졌고, 이에 따라 주일학교도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출가인의 감소로 인해 출가 제한 나이를 50살에서 65살로 연장했다.

이렇게 종교관이 바뀌는 시기에 한 종교에 대한 고집은 노마드들에게 치명적인 한계를 가져올 수 있다. 때문에 한 종교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따르되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좋다.

 “담을 수만 있다면 세계가 네 것이다.”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지도자의 가장 큰 의무다.”

 “천하의 땅은 넓고, 물은 많다. 너희가 각자의 군영을 확대한다면 많은 나라를 정복할 수 있다.”

 또한 칭기즈칸은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호라즘 정벌을 마친 후 돌아와 1226년 봄에 다시 남방 정벌을 시작했다. 물론 이 길에서 칭기즈칸은 놀란 말에서 떨어져 치명적인 상황에 이른다. 그리고 다음 해인 1227년 8월 25일 사망한다.

킵차크 칸국이 260년을 유지한 비결은?

칭기즈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먹기 위해서 헤매지 않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용기와 지혜로 새로운 땅을 정복해 군림했다. 칭기즈칸이 친아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던 첫아들 조치는 스스로 서방의 땅에 군림해 그곳에 정착했다. 그 나라가 킵차크 칸국(1243~1502)인데, 외래 민족이 세운 나라가 서방에서 약 260년을 존속했다는 것은 몽골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나라의 면적도 키르키스 초원을 중심으로 한 남러시아 일대이다. 서는 도나우(Donau, 다뉴브) 강 하류, 동은 아르피스 강(러시아와 중국 신장성 경계), 남은 캅카스(Kavkaz), 북은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지역까지 광활한 지역으로 러시아 현 러시아 상당 부분이 이 왕국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백성에 대한 사랑이 칭기즈칸에게는 존재했으니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

노마드는 칭기즈칸의 말대로 세상 어디서나 자신의 군영을 만드는 이다. 그러니 외로움은 타고난 본성이다. 2000년 즈음 칭기즈칸의 땅 몽골로 가서 산지 7년만에 기록(『몽골바람에서 길을 찾다』)을 남긴 한성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기 위해 길을 떠나야 했다. 남들이 살기 위해 머무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인생길이었다. 그런 나를 두고 세상은 방랑이라 하였으며 방황이라고 하였다. 나는 길을 보낼 때마다 삶의 버거움을 오롯이 홀로 겪어내야 했다. 그것은 무척이나 괴로웠고 힘든 일이었다. 같은 길 위에서 같은 배낭을 멨건만 나는 길 위에서조차 그들과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에필로그에서)

▲ 울랑보통 초원 사진=조창완 차이나리뷰 편집장 제공

노마드의 떠남이란? 

사실 당대 노마드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약간은 강요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신라 시대 견당사처럼 귀족층이 중심이 되어 당을 선택한 이도 있지만 장보고처럼 다양한 이유로 중국에 건너가 자신을 세운 이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족적을 남긴 이들 중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식민 치하에 들어간 조국을 떠나야 했던 이들이 많았다. 몽골의 작가 한성호도 그렇지만 당대 젊은이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떠남은 중요하다.

그런데 노마드의 떠남을 두고 칭기즈칸의 ‘백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어려운 주문이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사실 행복이라는 단어만큼 복잡한 것은 없다. 당대를 사는 사람들 가운데 돈 한 푼은 물론이고 권력과는 상관이 없어도 행복한 이가 있고, 국가 최고 지도자여도 행복과는 무관한 사람이 있다. 실제로 사람의 함량과 상관없이 권력이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측면도 많다.

이런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칭기즈칸은 비전을 주었다. 칭기즈칸에겐 옹칸의 공격으로 인해 발주나 강에 집결했을 때 19명만 남은 비참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야생마를 잡아서 배를 채우고 흙탕물을 마시며 미래를 같이 하자는 맹세를 했다. 그리고 다시 힘을 회복해 몽골을 세계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칭기즈칸에게 세계 정복 같은 꿈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가 호라즘을 치고 유럽까지 내달린 것은 자신의 백성들이 자유로운 교역을 진행할 때 방해하는 이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수많은 노마드들이 세계를 주유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자들의 앞에는 칭기즈칸의 보호가 존재할 것이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불행한 것은 시력은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헬렌 켈러)

필자: 조창완

고려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미디어오늘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9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글, 방송, 저술 등으로 중국을 전했으며, 2004년에는 중국 전문 여행과 방송코디네이션회사인 알자여행(www.aljatour.com)을 창업, 운영하고 있다. 2008년 귀국 후 한신대 외래교수, 인민일보 특임기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0년 중국 전문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5년을 일했다. 현재는 알자여행 대표로 일하며, 중국 전문 잡지 ‘차이나리뷰’ 편집장을 겸하고 있다. 그밖에도 중국 전문 컨설턴트로 중국 투자 유치, 관광객 유치, 방송 등 콘텐츠 교류를 하며 전문 강사 등으로 뛰고 있다.

 대표작: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 『차이나 소프트』, 『베이징을 알면 중국어가 보인다』, 『오감만족 상하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달콤한 중국』 등 13권

페이스북: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changwa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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