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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정복했던 칭기즈칸도 말에서 떨어졌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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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정복했던 칭기즈칸도 말에서 떨어졌다."

[세종경제신문 연재③]조창완편집장의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조창완(차이나리뷰 편집장) | 기사입력 2016/12/24 [08:26]

"세계를 정복했던 칭기즈칸도 말에서 떨어졌다."

[세종경제신문 연재③]조창완편집장의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조창완(차이나리뷰 편집장) | 입력 : 2016/12/24 [08:26]
거친 들판과 눈보라도 몽골인들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사진=조창완 편집장 제공/세종경제신문

중국의 역사는 이민족과 한족의 정권 교류사다. 한(漢, BC 206~AD 220)나라 이후 농경민족으로 정착한 한족은 용맹한 북방민족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수나 송, 명 같은 한족 국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북방민족의 부흥을 막는 것이었다. 반면에 변방 유목민족은 짧은 순간에도 부흥해 10배, 20배가 넘는 인구를 가진 중원을 장악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중원을 장악한 이후 노마드 근성을 버리고, 모두 정착민이 되었고, 왕조는 멸망했다.

문자도 몰랐던 칭기즈칸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나?

송을 몰아내고 중원을 장악한 것은 역시 소수민족이던 금나라(金, 1115~1234)다. 금 태조 아골타의 부흥으로 시작된 여진족은 처음에는 유목민족 특유의 힘으로 부흥했지만, 중원에 안착하면서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미 정착민이 된 금의 힘을 본 칭기즈칸은 1211년 쿠릴타이(부족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만리장성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금나라는 변경(汴京, 지금의 카이펑开封)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곧 멸망했다.

중원을 장악한 몽골은 유목 근성을 잃지 말라는 칭기즈칸의 유훈을 비교적 잘 지켰다. 원나라는 중국에서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밀려난다. 반면에 중앙아시아에서는 1500년대까지 다양한 국가로 존재하며, 몽골의 정치력을 이어갔다.

중국의 경우 한 왕조의 평균 나이는 100년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몽골은 작게는 150년 많게는 300년간 이민족이 주류인 나라를 다스렸다. 그 힘의 근간에는 칭기즈칸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스스로는 문자를 모를 만큼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세상의 지혜를 얻는데 주저하지 않고, 인재를 아끼는 등 놀라운 통치력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후세에도 큰 힘이 됐다.

이런 칭기즈칸이야말로 노마드의 가장 위대한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을 통해 중원을 장악하고, 이후에도 근원을 잃지 않았던 그 지혜를 배워본다.

세종경제신문은 2017년을 앞두고 21세기 격변의 시대에 칭기즈간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의 진로를 생각해보는 특별 연재 코너를 마련해 연재중이다. 오늘은  조창완편집장의 '칭기즈칸을 통해 읽는 노마디즘' 세번째 글이다.[편집자주]

3.칭기즈칸의 삶, 후반부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다. 이미 몇 차례 있었던 배신에 대한 대처였다. 그런데 옹칸의 아들 셍쿰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케레이트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결국 옹칸도 아들의 편에 섰다. 그러나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칸은 계략을 세웠다. 그는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다. 소수의 병사만 이끌고 옹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돌아가 버렸다.

도망간 테무진은 1203년 봄 셍쿰과 자무카 연합군을 마주했다. 여기서 테무진은 다시 한 번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한때 옹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이었다.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로 이는 몽골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차츰 패잔병들이 모여 3천 명의 군사가 됐고,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도 복귀해 힘이 쌓였다. 그해 가을 케룰렌 강 상류 제르 캅찰에서 칭기즈칸과 옹칸의 군대는 사흘 밤낮을 싸웠다. 칭기즈칸의 승리였다.

도망간 옹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셍쿰도 노략질을 하는 처지가 됐다가 죽었다. 1204년 곧바로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이후 의형제에서 적이 된 자무카가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테무진 앞에 끌려왔다. 테무진은 자무카를 배신한 부하들의 목을 쳤다. 자무카의 요구대로 피를 흘리지 않게 처형하고, 성대하게 경쟁자를 보냈다.

테무진,칭기즈칸의 등극

1206년 봄 성스러운 오논 강의 상류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테무진은 ‘칭기즈칸’에 등극했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 냈다.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 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칭기즈칸은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칭기즈칸의 제의를 받아들여 칭기즈칸은 많은 물자와 함께 상인들을 보냈다. 그러나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트(카자흐스탄 남부)의 총독이 상인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사신을 보내 총독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오히려 사신들을 죽였다.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세계를 정복했던 칭기즈칸, 말에서 떨어지다. 

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이제 서하, 즉 탕구트 공격을 준비했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 때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12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 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간쑤성(甘肅省) 칭수이 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이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에 잘 봉해져 돌아오는 길을 밟았다. 그의 장례지는 몽골의 한 초원이다. 몽골 전통에 따라 봉분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의 묘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고 있다. 당연히 그의 묘 작업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까울 것이다.

칭기즈칸이 죽은 지 7년 후인 1234년, 원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金国)를 물리쳤다. 1246년에는 토번(吐蕃)국이 투항했다. 1253년에는 대리(大理)국도 정벌해 남방 상당 지역도 원나라의 강역에 넣었다. 특히 원 세조 쿠빌라이 칸(1215년~1294년)의 시대에는 세계에 중국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가 1256년 화북에 세운 상도(上都, 지금의 베이징)는 한족과 몽골을 가깝게 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인들은 서서히 한족 문화에 빠져 들었고, 황제들도 말 위보다 정치를 위해 보좌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혜종(惠宗, 토곤 테무르) 때인 원나라 건국 68년에는 수도 상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중원을 잃었다. 이후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세상을 살되 한 뼘이라도 더 넓게 살고, 사람을 사귀되 한 명이라도 더 사귀며 기술을 배우되 한 가지라도 더 배워라.”(쿠빌라이 칸 명언집에서)

필자: 조창완

고려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미디어오늘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9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글, 방송, 저술 등으로 중국을 전했으며, 2004년에는 중국 전문 여행과 방송코디네이션회사인 알자여행(www.aljatour.com)을 창업, 운영하고 있다. 2008년 귀국 후 한신대 외래교수, 인민일보 특임기자 등으로 일하다가 2010년 중국 전문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5년을 일했다. 현재는 알자여행 대표로 일하며, 중국 전문 잡지 ‘차이나리뷰’ 편집장을 겸하고 있다. 그밖에도 중국 전문 컨설턴트로 중국 투자 유치, 관광객 유치, 방송 등 콘텐츠 교류를 하며 전문 강사 등으로 뛰고 있다.

 대표작: 『알짜배기 세계여행 중국』, 『중국도시기행』, 『차이나 소프트』, 『베이징을 알면 중국어가 보인다』, 『오감만족 상하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달콤한 중국』 등 13권

페이스북: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changwa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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