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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와 <봉선화> (2):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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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와 <봉선화> (2)

우리 가곡의 효시 <봉선화>

이호 기자 | 기사입력 2016/12/15 [10:37]

홍난파와 <봉선화> (2)

우리 가곡의 효시 <봉선화>

이호 기자 | 입력 : 2016/12/15 [10:37]
▲ 경기도 화성의 홍난파 생가

홍난파의 우울했던 1920년, <봉선화>의 멜로디가 탄생한 해

홍난파는 이듬해인 1920년 초, 다시 일본으로 가 도쿄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려다가 불온사상 소유자(2.8독립선언사건 연루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는 수 없이 니혼대학(일본대학) 문과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이해 가을 다시 귀국한다.

홍난파는 우울했던 이해 4월 28일 <봉선화(鳳仙花)>의 원곡인 바이올린 연주곡 <애수(哀愁)>를 작곡한다. <애수>의 악보는 이듬해 1921년 출간된 그의 창작 단편집 <처녀혼(處女魂)>의 서두에 처음 실린다. 1925년 선배 음악가인 성악가 김형준(1885~1950)이 이 책에 실린 <애수>의 멜로디에 노랫말을 붙임으로써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의 한과 소망을 담은 노래 <봉선화>로 재탄생한다. 김형준은 김인식, 이상준과 더불어 우리나라 양악(洋樂) 수입기의 3대 공로자로 꼽히는 분이다. <봉선화>는 이듬해인 1926년 홍난파가 발행한 <세계명작가곡선집>에 실리면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봉선화> 가사가 붙여진 해는 1925년이어서 1922년에 지어진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보다 늦지만, 원곡이 1920년에 작곡된 점을 감안, 가곡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1942년, 일본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신인음악회에서 당시 23세였던 젊은 소프라노 김천애(1919~1995)가 흰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올라 앵콜곡으로 <봉선화>를 애절하게 불러 동포들을 울린 일도 가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일제는 노래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자 3덜 가사가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는 불온한 내용이라 하여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정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후에도 무대에서 종종 <봉선화>를 불러 일경에 여러차례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를 대중에 널리 알리는데 가장 기여한 이가 김천애라는데는 이의가 별로 없는 듯 하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 시절에도 <봉선화>는 민주와 자유를 상징하는 노래로 불려졌다.

봉선화 - 김형준 작시, 홍난파 작곡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 서울 종로구 홍파동 '홍난파의 집' 앞에 서 있는 홍난파 흉상

홍난파의 당돌한 편지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인 듯

윤치호의 일기를 근거로 살펴보면, 홍난파는 1920년 초 도쿄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기 위해 두 번째 일본에 갈 때 윤치호의 지원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이해 가을 귀국했다가 연말께 다시 일본으로 가서 윤치호에게 바이올린 살 돈을 부쳐달라는 편지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보낸 편지가 윤치호에게 도착한 것이 1921년 정초쯤이라니까.

윤치호의 일기에서 홍난파에 대한 대목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홍난파 평전>을 비롯, 그간 어디에도 윤치호 얘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윤치호는 홍난파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당시에도 대표적인 친일파의 한사람으로 불렸기 때문에 그에게 신세진 이야기를 홍난파가 누구에게도 안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홍난파는 ‘바이올린을 사줄 수 없다’는 편지를 받고 윤치호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윤치호가 바이올린 살 돈을 못 부쳐주겠다고 하자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은 홍난파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나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 입장에서는 당연히 협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당시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지 4년쯤 되었을 때이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에서 귀족과 지주들은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우랄산맥 인근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되었다가 1918년 7월 볼셰비키 혁명세력에 의해 황후, 1남 4녀와 함께 총살된 후 불태워지는 비참한 일을 당했다. 윤치호는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편지를 받은 윤치호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 홍난파의 당돌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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