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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와 <봉선화> (1)
이호 기자  |  jsleek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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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14  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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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윤치호에게 보낸 협박편지

초창기 우리 음악의 선구자들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거의가 유학파였다. 홍난파(1898~1941)는 일본, 채동선(1901~1953)은 독일, 박태준(1900~1986)과 현제명(1902~1960)은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거의 100년 전인 그 시절, 일제치하에서 온 민족이 기를 못펴고 살 때에 해외 유학을, 그것도 음악유학의 길을 떠났다는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젊은 시절의 홍난파

당시 가난했던 조선에서 보통사람들에게 유학은 언감생심,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네 사람 가운데 집안이 부유해 유학을 간 사람은 전남 벌교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채동선 뿐이었다. 박태준과 현제명은 미국 선교사의 스칼러십 주선으로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홍난파의 경우,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으나 일찍이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였던 형 석후가 일본 유학자금을 대준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홍난파의 형 말고도 난파의 일본 유학자금을 지원해 준 사람이 있었다. 일제 때의 대표적 친일파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윤치호(1865~1945)다.

윤치호, 홍난파에 유학자금 지원

그같은 사실은 번역, 공개된 윤치호의 일기에 의해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다. 구한말 개화·자강의 중심 인물중 한 사람이었던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한일강제합병 후인 1912년에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기도 사건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민족진영의 인사였으나 이후 변절하여 친일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일본, 중국, 미국에 유학을 했던 그는 평생 일기를 썼는데 대부분 영어로 썼다. 그래서 번역작업이 필요했다. 그가 비록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사이나 근현대사에서 그의 역할과 행적이 역사연구에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윤치호 일기에 대한 번역이 이뤄졌고, 일부 학자들은 별도로 번역을 했다. 그러한 학계의 노력으로 2000년대 이후 그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 홍난파의 유학과 관련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21년 2월 6일 일요일 (윤치호 일기)

홍영후(작곡가 홍난파다-옮긴이)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윤치호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와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 청년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었다.(‘물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윤치호 지음, 김상태 번역, 도서출판 산처럼, 2014)

홍난파는 사비유학생, 윤심덕은 관비유학생

홍난파는 만 20세 때인 1918년 4월 처음으로 일본으로 가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홍난파가 이 학교에 들어갈 때 동기생으로 입학한 여학생이 있었으니 훗날 <사(死)의 찬미>를 불러 유명해진 성악가 윤심덕이다. 당시 홍난파는 사비(私費)로, 윤심덕은 총독부 주관의 조선인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선발돼 도쿄에 왔다. 최초의 동요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은 이 학교 3년 후배다.

<홍난파 평전>(김양환 지음, 남양문화, 2009)에 보면, “지주나 자산가, 혹은 고위관리의 자식도 아닌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형 석후의 지원과 배려 덕분이었다”고, 유학비용은 형 석후가 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홍난파는 유학간 이듬해인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에 앞서 일본에서 먼저 터진 2.8독립선언사건에 연루되어 이해 3월 중도 귀국한다.

홍난파는 글재주도 있어서 일본에 있을 때인 1919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예술잡지인 <삼광(三光)>을 창간하였다. 그는 여기에 음악평론, 수필, 단편소설, 번역소설 등 10편의 자신의 글을 싣는다. <사랑하는 벗에게>란 제목으로 실은 번역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일본어판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었다. 국내에 소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최초 번역자가 홍난파였던 것이다.

그는 이해 10월 경성악우회를 조직, YMCA강당에서 창립연주회를 갖는 등 음악활동을 계속하며 12월에는 <삼광> 2호도 발행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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