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부활> 출판 2년 후 파문 당해
러시아 정교회 종무원은 톨스토이에 대한 파문을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이단자나 가짜 교사들의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 건설된 교회의 기초를 흔들려고 했다. 하지만 신성한 교회는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다. 어떤 힘도 교회를 이기지는 못한다. ---그런데 가짜 교사가 또 나타났다. 백작 레프 톨스토이가 그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로서 러시아에서 태어나 정교의 세례를 받은 자인데 그 오만한 지력(知力)에 유혹되어 ---그를 길러준 정교회를 거부하였고,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어긋나는 사상을 세상에 보급시키는데 쓰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가 제시한 파문의 근거는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첫째, 톨스토이는 삼위일체의 살아있는 하느님을 부정했다. 톨스토이가 파문됐다는 뉴스는 사회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곳곳에서 정교회의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반면, 톨스토이의 집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엄청난 수의 손님들과 편지와 꽃다발들이 날아들었다. “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이 세상에서 악을 극복하여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일이다. ---교회의 여러가지 의식이나 상징은 다 군더더기다. ---그런데 지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교회의 제도나 행사에 있지 않고 ‘사랑’과 ‘평화’에 있다고 하면, 그런 제도나 행사- 군더더기에서 어떤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낸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민중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짜르체제, 농노문제와 더불어 정교회는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 개혁되어야 3대 문제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다. 1917년 볼쉐비키 혁명 후 러시아정교회가 소비에트 정부와 민중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역사적 배경은 바로 그러한 뿌리깊은 국민적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저작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기독교적이며 모든 작품에서 기독교적인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의 신앙관에 다소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파문을 당한 후 1901년 영국의 ‘자유로운 말’ 출판사에서 체르트코프가 발행한 톨스토이의 <종교회의에 하는 대답>을 보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인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사실상 부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 전에 ---나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교회의 가르침이 교의적으로는 간교하고 유해한 거짓과 위선이며, 실제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지닌 모든 의미를 완전히 감추어 버리는 가장 저속한 미신과 제의들의 집합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파문당했다기 보다는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해온 톨스토이를 증오했을 뿐아니라 심각하게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는 두 사람의 황제가 있다. 니콜라이 2세와 레프 톨스토이다. 그 둘 중 누가 강한가? 니콜라이 2세는 톨스토이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는 톨스토이의 권좌를 흔들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니콜라이의 권좌와 그 왕조를 뒤흔들 수 있다.” 톨스토이가 파문을 당한지 100년째 되던 해인 지난 2001년 그의 손자인 톨스토이 박물관장 블라디미르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 톨스토이와 화해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한편, 앞서 ‘소설 <유정>의 무대 바이칼’에 대해 쓰면서 작가 이광수가 1913년 기독교계 학교인 오산학교 교직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가 톨스토이를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