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는 '못살포'였다" 평화를 위해 흘린 눈물 강병대교회
상태바
"모슬포는 '못살포'였다" 평화를 위해 흘린 눈물 강병대교회
  • 민경중 대표기자
  • 승인 2016.08.12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롯이 걷는 제주 기독교 순례길 1편]
1953년 3월 20일 연합예배후 군인들과 모슬포 주민들이 함께 사진촬영을 했다. 사진=허창희 제공

# 모슬포는 ‘못살포’였다

 한국전쟁 당시 모슬포에는 이미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고 두 달이 안 되어 급하게 생긴 훈련소가 제1훈련소인데 처음에는 대구에 두었다가 이듬해 1‧4후퇴가 시작되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소를 모슬포로 옮겼다.

깊은 고민도 없이 그저 전쟁터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다 훈련소를 열은 셈이었다. 훈련소의 이름은 강한 병사를 길러내는 곳이라 하여 ‘강병대’였다.

그리고 전쟁이 더 심해지자 제2훈련소를 세웠는데 그곳이 지금의 연무대인 논산훈련소이다. 이후 다시 거제에 제3훈련소를 세우고 모두 일곱 곳에 훈련소를 세웠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논산의 제2훈련소를 제외하고 모든 훈련소는 철수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7권에는 이곳에 대한 당시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는 조용하던 이 섬마을을 10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천막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중간생략) 강병대는 1951년 창설 때부터 56년 해체되기까지 50만 명의 장병을 훈련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훈련소 신병 양성 기간은 16주였지만 낙동강전투 당시에는 전선에 투입시키는 데 2주 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제1훈련소는 참으로 대단한 규모의 천막도시였다. 10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부대의 막사가 거의 천막이었다. 수많은 피난민과 훈련병 가족이 연일 몰려들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대정면에서 상주하는 인구가 무려 7만 명을 넘었다. 제1훈련소에 이어 모슬포에는 군 야전병원인 98병원이 들어서고, 육군 제29사단이 창설되었으며 임시로 대정초등학교에 공군사관학교를 이전해왔다. 때문에 대정초등학교 교정에는 공군사관학교 훈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와 함께 공군도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을 모슬포 공항이라 부르면서 정부 고위인사는 물론 외국 귀빈과 장성급들의 이동과 급한 물자 수송을 담당했고, 이때부터 미 공군이 모슬포 비행장에 부대를 배치하여 미군까지도 모슬포에 주둔하게 됐다. 게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이곳 모슬포에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세 군데나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모슬포는 그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땅이었다. 물도 부족하였고 바람과 비는 많았다. 모슬포의 주민들도 죽지 못해 살아야 했고, 훈련병들은 말할 나위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 모슬포는 ‘못살포’였다.

 

 # 강병대교회는 울음바다였다

 강병대교회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건축되었다. 국군 공병대가 건축하였는데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교회를 지어 외벽이 검다. 벽체 위로는 목조 트러스를 올린 뒤 함석지붕을 얹었다. 장식도 없다.

강병대의 당시 훈련소장은 장도영 장군이었다. 그는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훈련병들의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의 건축을 지시했다.

강병대교회는 훈련소의 병사들을 위한 교회였다.

훈련병들은 서른 살 아래 사내들이었다. 집을 떠나와 가족들과 이별을 고하였을 때 그들의 이별은 그저 군 복무기간 동안의 이별이 아니었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입소였으므로 가족을 떠나오며 병사들은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눈물을 보면서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온 셈이었다.

그들의 훈련은 언제나 명백한 실전을 목표로 하였다. 잠시도 정신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이 어린 병사들의 몸과 마음을 짓이겼다.

강병대교회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했다. 담대하라, 말하였고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말하였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또 말하였다.

병사들은 울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울었고, 머나 먼 섬에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어디로 향할지 모를 그들의 인생 때문에 또 울었다. 두려워서 울었고, 배고파서도 울었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꾹꾹 억눌렀다.

강병대교회는 그 시절 그런 젊음들이 자신의 다짐을 내려놓던 제단이었고, 신앙으로 두려움을 이겨

 

내고자 부르짖던 기도의 자리였다.

강병대교회의 그 시절 이야기는 허창희 장로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허 장로는 당시 스물네 살이었고 강병대 창설 멤버였다. 당시 스물네 살이었고 28일 동안 간부교육대에서 훈련 받고 나왔을 때 육군하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육군의장대 창설멤버로 들어가 활동했다.

 

“당시 예배를 인도하던 분은 피난민 출신인 박치순 목사였어. 기골이 장대했지. 그 뒤로 장덕호, 장성칠, 박치순 목사 등이 모두 피난민 출신이었지 아마. 그들이 군대 안에 군목이 필요하니 군목제도를 만들자고 했어. 군목은 계급도 없었지만 병력이 많으니 인기가 대단했지. 강병대교회 중심으로만 활동했는데도 하는 일이 참 많았어. 나는 그때 성가대원이었는데, 그 뒤로 내가 50년 동안이나 교회 성가대로 활동했으니 그 시작이 참 기구한 거지. 당시 교회에는 피난민들도 많았어. 특히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교인들이었거든. 나도 개성 출신인데, 우리 집은 6남매가 개성에서 가장 먼저 피난 떠난 집일 걸 아마. 아버지가 장로였으니까. 뺄갱이 치하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지. 장가 갈려고 준비한 것들을 모두 내버려두고 나올 때 우린 일주일 후면 다시 올 수 있을 거라 믿었지. 그래서 이불만 싸들고 왔는데…….”

허 장로는 아직도 수첩에다 훈련소 시절 그가 불렀던 훈련소가를 적어서 들고 다닌다.

                제주도 넓은 들에 바람소리 거세이니

한나라 젊은이의 고동소리 우렁차다

깃발을 높이 들고 즐거웁게 뭉쳤으니

조국을 지킬 사람 우리 두고 또 있으랴.

 

이제 추억이 깃든 기억이 되어서인지 그는 허허 웃었다. 그러나 웃음 속에는 그때 그가 본 수많은 눈물들이 배어 있다.

처음 훈련소에 입소하면 사회정신을 일소한다며 바쁘게 움직이게 만들고, 배고프게 만들고, 구타도 심했다.

전투모가 제주의 강풍에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는데, 제 것을 잃어버리면 남의 것을 훔쳐 썼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도 누군가 위에서 모자를 벗겨가지 않을까 주의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 자칫 훈련병이 대위의 모자를 훔치기도 했는데 대위모자를 쓰고 다니는 훈련병도 있었다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모든 게 지나가버린 뒤니까.

훈련소에는 육군병원이 들어와 있었는데 훈련병 가운데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어 나가는 병사들도 많았다. 제주도의 풍토병을 앓다가 설사만 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었다. 그런 곳이 모슬포였다.

 

“한 친구는 장교반으로 갔는데 훈련소장의 우등상까지 받으면서 잘나갔어. 이 친구가 육군 소위를 달고 전쟁터로 나갔는데 나간 지 일주일 만에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지. 28일 훈련 받고 나갔는데 뭘 알겠어. 안타까운 일이지.”

 

다행히 허 장로는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강병대교회에서 그는 교회 부설 샛별유치원의 교사로 근무하던 처녀와 교제하였고, 결혼까지 했으니 그곳은 아내를 만나게 해준 고마운 곳으로도 남았다.

1년에 한 번 창설일이 되면 체육대회를 가졌다. 체육대회에선 가장행렬도 열리고 무술경연대회도 열렸다. 기마전을 하다가 상대의 발길에 차여 떨어졌는데 이마가 찢기도 했다.

10개 연대나 되는 병력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 신병과 퇴소병을 수송하는 일도 큰 일이었다. 미국 항공모함이 매일 한 번씩 오갔을 정도였다.

전쟁 이후 강병대교회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지역주민을 위해 야간 중학교를 개설하였고 14회에 걸친 졸업식을 통해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02년에는 문화재청 등록 문화제 38호 근대군사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공군부대 및 지역 해병부대 기독 장병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 강병대교회에서 평화를 기도하다

 

순례자가 되어 찾아온 강병대교회는 전쟁이 가져다준 비극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모슬포의 육군훈련소는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역사의 한 조각인 셈이었다.

거기서 그 젊은 병사들의 눈물이 없었더라면, 거기서 두려움에 떨며 그들의 젊음을 전쟁과 맞서야 했던 슬픈 역사가 없었더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온 이들이 더 이상 그들과 만날 수 없다는 슬픔에 그 숱한 날을 눈물 흘리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아니라면 적이 되지도 않았을 형제들을 향해 그렇게 총구를 겨누지 않았더라면….

모슬포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강병대교회에서 나는 그런 가정들을 부질없이 떠올렸다.

어떤 이는 쉽게 전쟁 가능성을 입에 오르내리고, 어떤 이는 전쟁이 최선의 해결책인 양 지껄인다. 전쟁을 해서라도 얻을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치시지 않는가.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8-42절 말씀이다. 이것은 평화의 길이다. 이렇게 해서 평화의 길을 가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맞받아칠 태세를 갖추라는 게 아니다. 맞고, 겉옷을 내주어서라도 평화하라는 것이다.

전쟁은 끝내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가야 하는 길이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의 최후선택일 뿐이다. 그것을 선동할 수 있을 만큼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너그럽지 않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운동가 임영신 씨는 세계의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이라크에서 인간띠를 만들며 폭격에 맞섰다. 그때 그녀는 이런 글을 썼다.

 

저는 저의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막아주세요.

하나님….

그러나 내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더 길고 깊은 통곡으로 울고 계십니다.

당신의 땅 위에서 무고한 피로 땅을 적실 전쟁의 전야

전쟁을 고스란히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 어깨 사이로

그는 가만히 내려서고 계십니다.

사람을 유린하고 피로 적실 이 전쟁 앞에

나의 하나님은 그만 이 땅으로 가만가만 내려서십니다.

저들과 함께 폭격을 맞이하고저

저들과 함께 두려움에 떨고저

저들과 함께 아들을 잃고저.

 

평화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늘 이러하였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이신 그분의 선택은 늘 못난 자식을 부여안고 그를 용서하고 품어주신 모습이었다. 누군가 폭격을 하려고 나서면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던져 그 폭격을 함께 맞으시고자 결정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럼으로써 지켜야 할 생명을 지켜내셨다. 인간이 전쟁을 선택할 때마다 그분에게 전쟁은 명백한 적이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으므로.

 

강병대교회에서 우리는 평화를 위해 기도를 심는다. 강병대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의 눈물을 뿌려야 할 우리 시대의 성지이다. 여기서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들의 눈물로써 그 평화의 의미를 새겨놓았다. 강병대교회에서 불과 얼마 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던 그들의 슬프고도 아픈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제주 순례길은 모슬포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