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띠뿌라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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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띠뿌라뗄리
  • 김영회 / 언론인
  • 승인 2016.05.1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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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그 어떤 사상, 그 어떤 이념일지라도 적십자의 '인도주의'를 우선하지는 못합니다-

1858년 여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지방에서 대규모 전쟁이 한창 불꽃을 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이탈리아 통일전쟁.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30만 명이 뒤엉킨 전투는 아비규환의 잔혹한 참상을 연출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해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31세의 스위스 사업가 장 앙리 뒤낭이 그곳을 지나다가 참혹한 광경을 보았고 마을의 주민들을 모아 어느 쪽도 가리지 않고 부상병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펼칩니다.

뒤낭은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솔페리노의 회상’이란 제명(題名)으로 글을 썼고 이 책은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뒤낭은 이 책에서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면서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 제안은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급기야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창립되는 계기를 만듭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가장 큰 인도주의 구호단체로 활동을 펼치는 적십자는 장 앙리 뒤낭에 의해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장 앙리 뒤낭(Jean-Henri Dunant)은 182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부모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일에 힘쓰며 자라났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YMCA 창설에 관여하는가 하면 아프리카 알제리에 주민들의 빈곤 퇴치를 위한 제분회사를 설립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온몸을 바칩니다. 뒤낭이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것은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뒤낭은 적십자 활동으로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해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사하여 글을 옮겨 적는 일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고 1892년에는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으로 옮겨가 외롭게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한 신문기자가 양로원 취재 중 우울증을 앓고 있는 노인이 뒤낭임을 알고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뒤낭은 1910년 82세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사상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인도주의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1901년 스웨덴의 노벨상 위원회는 뒤낭의 평화와 박애정신을 높이사 제1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적십자는 그 뒤로도 1917년, 1944년, 1963년 인도주의 실천의 공로를 인정받아 세 차례나 더 노벨평화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엊그제 5월 8일은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정한 ‘세계 적십자의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바로 뒤낭의 생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적십자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05년입니다. 이때 고종황제는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설립을 반포했고 일제치하 숱한 수난을 겪은 뒤 정부수립 뒤인 1949년 대한적십자를 재조직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는 14만명의 자원봉사원들이 있고 이들은 일 년 열두 달 아무런 대가나 전제 조건 없이 고통 받는 국민들의 어려움을 달래주는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가정집에 불이 나면 소방차를 뒤따라 구호품을 싣고 가는 것이 적십자입니다. 이들 봉사원들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다’는 사명감 하나로 자신들을 흔쾌히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적십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진이나 풍수해 같은 재난의 이재민 구호사업은 물론이요, 노인들을 위한 급식봉사, 세탁봉사를 비롯해 탈북 새터민 정착을 위한 도우미봉사,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국민헌혈운동, 병원운영, 해외 재난현장 파견 활동, 이산가족 상봉사업, 북한 식량지원사업, 청소년 적십자 교육, 심지어 극빈층 김치 담아주기 까지 그야말로 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의 경우 모든 재난은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 적십자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적십자정신은 ‘인도주의’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 그 어떤 이념도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는 적십자의 인도주의에 우선하지는 못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구원해 주는 적십자정신, 그가 누구이든 현장에 펄럭이는 적십자 깃발을 보고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성스러운 인도주의 때문입니다.

적십자 하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44년생인 반 총장은 충주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전국고교생 영어웅변대회에서 입상해 그 상으로 다른 3명의 학생과 미국견학을 갔고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장래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돼 그 꿈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고 합니다. 반 총장은 고교시절 내내 RCY(청소년적십자)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반 총장은 “한번 적십자인은 영원한 적십자인”이라면서 매년 고국의 RCY단원들을 유엔본부로 초청해 봉사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후배들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에 처한 남을 돕는 이타주의자(利他主義者)가 있기 마련입니다. 인생을 살며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선택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이들에게 존경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앙리 뒤낭은 솔페리노전장에서 부상자들을 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뚜띠 쁘라뗄리!”(Tutti Fratelli). “모든 사람은 형제다”라는 이탈리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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