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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기행]"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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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기행]"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

푸쉬킨의 옛 집을 찾아서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6/02/14 [20:42]

[러시아 문학 기행]"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

푸쉬킨의 옛 집을 찾아서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6/02/14 [20:42]

결투로 생을 마감한 푸쉬킨의 삶과 사랑의 흔적들

▲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알렉산드르 푸쉬킨과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
▲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쉬킨의 신혼집

179주기에 찾아간 푸쉬킨 기념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쉬킨(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쉬킨)의 옛 집을 찾아간 날은 2016년 2월 10일. 한국에서는 설 연휴 마지막인 수요일이었다. 이날 모스크바의 오전 기온은 영하 3도로 서울보다는 조금 낮았지만 잔뜩 껴입은 덕에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집 건너편에 서있는, 이미 사진에서 봤던 푸쉬킨과 그의 부인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동상을 먼저 사진에 담은 후 푸쉬킨의 집으로 갔다. 아르바트 거리의 입구 가까이에 있는 이 집은 이층구조의 에메랄드 빛 건물로 푸쉬킨 부부가 신혼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은 푸쉬킨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은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건물로 들어가 지하 통로를 통해 입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므로 그렇게 출입구를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매표대에 가니 이날은 푸쉬킨이 세상 떠난 날, 즉 기일이므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단다. 기일에 온 방문객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2백 루블인 입장료는 안 받았지만 기념관 내부의 사진을 찍는 데는 100루블(우리돈 1700원 가량, 환율 하락으로 2년전의 약 절반 수준)을 내야했다.

나는 이날이 푸쉬킨이 세상 떠난 날인지 몰랐다. 나는 그가 1월 29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월 29일과 2월 10일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푸쉬킨이 살던 시절 제정러시아에서는 지금 우리가 양력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을 쓰지 않고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때부터 내려오던 율리우스력을 썼다고 한다.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날짜의 차이는 십여일로 우리의 음력, 양력처럼 크지는 않다.

1917년 볼쉐비키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진 후 새 러시아정부(구 소련)는 1922년 서방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푸쉬킨 사망 당시 1월 29일은 양력으로 2월 10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날은 푸쉬킨 179주기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기념관에 전시돼있는 결투용 권총

▲ 푸쉬킨 시절 사용된 결투용 권총

 

기념관 입구에서는 신발에 얇은 1회용 비닐 덧신을 신도록 되어있었다. 기념관의 바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러시아에서 극장, 박물관, 기념관, 식당 등에 들어갈 때처럼 두터운 겉옷은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

건물안에는 푸쉬킨의 초상화와 친필 유고, 그리고 그림을 곧잘 그렸던 푸쉬킨이 연필로 스케치한 몇몇 얼굴들, 시계, 테이블, 의자, 피아노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1층 한쪽 구석에는 길쭉한 모양의 당시에 사용하던 권총이 작은 유리장 안에 있었는데, 이유는 푸쉬킨이 권총 결투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투 때 사용했던 그 권총은 아니지만 일종의 상징물인 셈이다. 우리나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같은 종류의 브라우닝 권총을 총알과 함께 전시해 놓은 것처럼.

푸쉬킨이 결투를 한 이유는 뒤에 더 설명하겠지만, 미인 부인을 둔 탓. 뛰어난 미모로 인해 나탈리야는 당시 사교계의 꽃이었다. 그런 만큼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푸쉬킨과 동서지간이기도 한 프랑스 장교 출신 조르쥬 단테스와는 불륜관계라고 소문이 났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권총결투가 벌어졌고 푸쉬킨은 단테스의 총을 맞고 이틀 뒤 사망했다.

당시 귀족들간의 결투는 일반적으로 입회인이 건네준 권총을 들고 서로 등진 채 일정한 거리만큼 걸아간 다음 돌아서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 “발사” 등 입회인의 구령에 따라 진행됐다. 첫 발에 맞은 자가 없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당시 단테스의 총이 먼저 발사됐고 푸쉬킨은 복부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푸수킨은 복부를 움켜쥐고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 단테스를 향해 쐈다. 그러나 그이 총알은 단테스의 오른팔과 갈빗대 두 대를 부러뜨렸을 뿐이다.

결투가 벌어진 곳은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그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집은 푸쉬킨이 나탈리야 곤자로바와 결혼한 1831년에 3달가량 신혼생활을 했던 곳으로 이집 2층이 주거 공간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이사한 후론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기념관 이층의 한쪽 벽에는 나탈리야 곤자로바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이미 사진에서 본 얼굴이지만 과연 그림속의 그녀는 백옥과 같은 피부의 절세 미인이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초상화를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 물론 기념관의 이 초상화는 원본은 아닐 것이다.

1,2층으로 된 기념관은 크지 않았으나 내부에는 안내하는 이들이 많았다. 주로 나이든 여성들이다.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자부심이 대단한 분들이라고 했다.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계속)

▲ 나탈리야 곤자로바 (모스크바 푸쉬킨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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