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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노래 / 내 맘의 강물 (4):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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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노래 / 내 맘의 강물 (4)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6/02/01 [17:58]

고향의 노래 / 내 맘의 강물 (4)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6/02/01 [17:58]
▲ '성산동 살롱 음악회'에서 이수인 곡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바리톤 이정식

친구가 보내온 시 <고향의 노래>

“남산의 중앙방송국에서 합창단 연습을 끝내고 남산 자락에 자리한 대폿집 구석에서 소주 한 잔 걸치는 낭만이 일품이던 어느 가을, 집에 와 보니 마산 제일여고 교사 시절 단짝이던 친구이자 시인이던 김재호 선생으로부터 엽서가 와 있었다.

 서울이라고 떠나면 모두가 고향을 잊느냐는 작은 눈 흘김과 함께 노래하던 음악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썼노라고 시를 한 편 보내왔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곳 초가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 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나는 친구의 엽서를 손에 들고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의 우정과 고향의 숨결이 온 몸에 전율처럼 느껴졌다.

사랑스런 친구의 우정을 생각하며 단숨에 쓴 <고향의 노래>는 그 후 테너 엄정행의 목소리로 레코드를 타고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내 맘의 강물, 59쪽)

 앞의 글은 이수인이 ‘2000년 12월 성산동에서’쓴 것이라고 책 속에 적혀있다. 이수인은 그 후 2002년 1월 <고향의 노래>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몸살 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바라고 바라던 귀한 아이를 얻은 어머니의 기쁨에 비길 만한데. 이는 오직 창작의 기쁨을 맛본 자만이 누리는 특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묻는다면 단연 독서나 명상을 통해 얻은 좋은 글과 악상으로 새로운 곡을 탄생시켰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1960년대 말 <고향의 노래>를 작곡하고 났을 때 받은 마음의 위안과 행복감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당시 나는 꿈같이 지낸 고향에서의 교직생활을 접고 서울로 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도회지 부적응증’과 함께 향수병이 날로 심해져 외롭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 벗으로 친하게 지내던 김재호 시인이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엽서에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로 시작되는 그리운 고향 소식을 적어 보내 주었다.

 나는 곧 피아노 앞에 앉았고 그래서 태어난 곡이 바로 <고향의 노래>였던 것이다.“ (내 맘의 강물, 86~87쪽)

김재호 선생은 1938년 10월 경남 김해 출생. 연세대 국문과를 나와 당시 마산 제일여고에 국어교사로 재직중이었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시 <강물>이 당선된 후 활발하게 시작(詩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고향의 노래>는 이처럼 이수인 선생과 김재호 선생의 인연의 열매였다.

작곡가도 자신의 작품 중 완성하고 났을 때의 만족감과 행복감이 더 큰 작품이 있을 터. 발표 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유명 가곡의 반열에 오른 <고향의 노래>의 경우가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계신 이수인 선생. 다섯번째 토요일 저녁에 열리는 '성산동 살롱 음악회'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이수인(왼쪽) 작곡가와 이안삼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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