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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꿈> (2):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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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꿈> (2)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5/11/29 [21:59]

황진이의 <꿈> (2)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5/11/29 [21:59]
▲ 황진이의 묘

김성태에 의해 노래가 된 황진이의 <꿈>

  1950년 어느 날, 작곡가 김성태씨는 김억의 번역시 <꿈>을 읽으며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작곡에 들어간다. 김억은 6.25전쟁이 발발한 이해 납북됐다. 납북 이후 그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다 어떻게 세상을 떴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어느 조그만 출판사에서 일하다 사망했다’는 등의 불확실한 소문만이 전해질 뿐이다.

  가곡 <꿈>의 노래 1절의 가사를 보면 앞서 살펴본 김억의 두 번째 번역시 그대로이다. 그리고 2절은 1절과 같은 내용인 마지막 4행을 빼놓고는 가사를 곡의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김억의 두 종류의 번역과 시조풍 번역의 내용을 적절하게 잘 소화하여 1,2절이 잘 이어지도록 하였는데, 감정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다.

  가곡 <동심초>의 2절은 오랫동안 알려진 것처럼 작곡가의 ‘가필’이 아니라 같은 한시의 다른 번역임이 밝혀졌지만, 이 <꿈>의 2절은 그야말로 ‘가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다.

김억, 황진이를 "천재"로 평함

   김억은 <옥잠화>에서 황진이에 대해 짧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극찬해 놓았다.

   “황진이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시기(詩妓). 시·노래·글씨·그림의 여러 방면에서 기능을 발휘한, 그야말로 천재(天才)의 인물(人物). 시기(詩妓)로는 고금(古今)의 독보(獨步).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초로 명종(明宗, 재위 1545-1567)시대의 위관(偉觀).” [주: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송도삼절; 송도(지금의 개성)의 세가지 유명한 것이란 뜻으로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컬음. 위관; 위대한 광경 또는 훌륭한 구경거리란 뜻.]

   황진이는 천민인 기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제대로 기록된 것이 없다. 개성 출신이며 조선 중중 때의 사람으로 단명했다고 전해지나 언제 출생하여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대체로 15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데는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1506년경에 태어나 38세 때인 1544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1516년에 출생해 1567년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신에 관해서는 황진사의 서녀라는 설, 혹은 맹인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미가 관노비 신분인 여악사였다는 설도 있다.

  황진이에 관한 소설의 원조격인 이태준(1904~사망년도 미상, 해방후 1946년 경 월북)이 일제 때인 1930년대에 쓴 소설 <황진이>에 국문학자이자 시인인 가람 이병기(1891~1968) 선생이 서언(일종의 추천사)를 썼는데 여기에 황진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가람, "황진이는 뛰어난 예술가"

“그는 이조 중종 때 송도 황진사의 서녀로서 절등한 미모, 호협한 성질, 탁월한 재분을 가지고 거문고 노래 시가 등을 잘하고 기생이 되어 국중 명창율객(名唱律客)과 문인학자(文人學者)와도 사귀고 명산대천을 찾아 놀기도 하여 그 일생을 분방자유하게 살았다.

그의 사적은 식소록(識少錄) 어우야담(於于野談) 송도기이(松都記異) 소호당집(韶濩堂集) 중경지(中京誌)에 약간 실려있고, 그의 저작은 기아(箕雅) 동국시화(東國詩話) 소화시평(小華詩評) 해동가요(海東歌謠) 청구영언(靑丘永言) 가곡원류(歌曲源流) 대동풍아(大東風雅)에 적혔는데 우리 노래의 단가(短歌, 시조를 일컬음)가 여섯수, 한시(漢詩)가 오언 칠언 시를 합하여 네수쯤 전한다. 이와같이 그이 사적, 저작은 전하는 것이 풍부하달 수 없으되 그것으로도 그의 인물생활 가치는 얼마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 명기(名妓)라 하기보다도 뛰어난 한 예술가(藝術家)이었다.

그는 문벌도 상당한 집에 태어나 그 순결한 처녀로서 기생생활에 전환함은 악착하고 좁은 그 문을 벗어나 좀 더 너그럽고 수나롭게 살자든 것이다.

그는 기생을 한 직함으로 삼고 예술에 살자든 것이다. 그는 실로 예술이 종래의 그 구구하든 제도나 도덕의 부문보다는 넓은 것임을 알었든 까닭이다.

이에 이를 이태준군이 소설로 지었다. 군은 그동안 소설을 많이 지었으되 이러한 소설만은 처음 겸 마지막으로 써본다 하고 매우 노작을 하였다.“

   가람 선생은 황진이를 가리켜 ‘명기라고 하기보다도 뛰어난 예술가’라고 하였으니 그녀를 천재라고 한 김억 선생의 평가와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황진이가 15세 때 그를 보고 상사병에 걸린 이웃 총각이 죽었는데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황진이가 자신의 속적삼을 벗어 덮어주자 상여가 움직였는데 이를 계기로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0년을 면벽수도에 정진해 생불로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키고,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다가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전해 온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벽계수와의 일화, 소세양, 송순, 이사종, 이언방, 이생, 엄수와의 교유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평양감사 백호 임제(白湖 林悌)가 개성의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추도의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이로인해 조야(朝野)의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청초의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어떤 기록도 송도의 명기(名妓)였던 황진이가 뛰어난 시인이었다는데는 이의가 없으며 노래 또한 매우 잘 불러 절창(絶唱)이었다고 전해온다. 소리가 매우 아름다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선녀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남자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풍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런 황진이가 꿈속에서라도 간절하게 다시 만나고 싶어한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황진이가 그리워한 이가 그녀가 대면하였던 수많은 남성 중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시 역시 그녀의 가슴속에 담겨있던 깊은 한(恨)의 한가닥을 풀어낸 것이리라.

  한편, 우리가곡 <동심초>의 원본 한시 <춘망사>를 쓴 당나라 때의 기생출신 여류시인 설도와 관련, 중국에서는 그녀가 살았던 사천성 성도의 망강루공원 안에 묘지는 물론이고 ‘설도기념관’과 두 개의 석상까지 세우며 그녀를 정성스럽게 기리고 있다. 이에 비해 황진이는 그동안 개성 동문밖에 있었다던 무덤의 존재조차 잊혀져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11년 11월 21일 북한의 조선중앙TV의 보도로 그녀의 무덤이 복원됐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조선중앙TV는 이날 개성시가 오랜 작업을 통해 역사유적 및 명인들의 묘를 발굴 복원했다면서 그 가운데 <열하일기>의 작가 박지원(1737~1805)과 황진이의 묘가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방송은 박지원의 묘는 개성시 전재리 황토고개 옆에 있고, 황진이의 묘는 개성시 선정리에 있다고 했다.

  야사에 황진이가 죽기전에, “나는 생전에 성격이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사후 산에다 묻지말고 대로변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개성에 있다는 황진이의 무덤이 대로변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북 경색이 풀려 개성 관광이 활성화 되면 황진이의 묘를 찾는 관광객도 제법 있을 텐데, 이들에게 그녀의 시로 된 우리가곡 <꿈>이라도 들려주면 어떨까.

▲ 혜원 신윤복, '청금상련',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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