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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디스: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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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디스

김영회 / 언론인 | 기사입력 2015/07/31 [10:27]

셀프 디스

김영회 / 언론인 | 입력 : 2015/07/31 [10:27]

 ʻʻ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나 없이
‘네탓 타령’을 한다.

한국가톨릭이 사회정화를 위해 ‘내탓이오’ 운동을 벌인 것은 25년 전인 1990년이었습니다. ‘평신도의 날’을 맞아 신뢰회복운동의 하나로 불 당겨진 이 캠페인은 처음에는 교계안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전국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구호는 가톨릭 주요기도문에 나오는 ‘고백의 기도’ 중 일부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가슴을 세 번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 이옵니다”하는 내용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당시에도 온 사회에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있던 터라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신선한 메시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어 많은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가톨릭이 이 운동을 벌인 배경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어째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7~3)라고 한 예수의 말씀처럼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을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를 앞장서서 반성하자는데 있었습니다.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내 탓이오’ 스티커를 자동차 뒷 유리에 붙여 시범을 보였고 모든 신도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이내 전국의 도로에는 수 많은 ‘내탓이오’ 차량들이 줄을 지었고 그 것은 곧 국민적 자각운동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국민의 무관심을 일깨우는데는 기여했지만 아쉽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몇 년 뒤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고 할 만큼 갈등과 분란을 겪고 있는 것은 너나 없는 ‘네탓’ 풍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지역사회, 정치권,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잘못은 오로지 너 때문이라는 ‘네 탓타령’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잘되면 내가 잘해서 잘 된 것이고 잘못 되면 누군가 잘못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전해져 오는 것만 봐도 남을 탓하는 그런 나쁜 풍조는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국회를 탓하고 국회는 대통령을 탓하고 여당과 야당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 서로를 탓하고 또한 여당은 여당대로 패를 갈라 네탓 타령, 야당은 또 야당대로 편을 갈라 네탓 타령으로 날이 새고 해가 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자신의 미숙한 국정운영은 자각하지 못하고 국회나 야당을 원망하는데 익숙해져있고 야당 또한 국가 원수인 대통령을 동네북 두드리듯 하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도자들이 네 탓타령으로 일관하건대 시정의 장삼이사(張三李四), 범부(凡夫)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서로 제 잘난 것만 알지, 남의 잘 난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게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불가(佛家)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체유아(一切唯我). 모든 것은 오직 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가톨릭의 ‘내 탓이오’와 같은 말입니다. 종교의 신비와 심오한 철학이 그러하거늘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남탓하기만을 즐겨하니 세상이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새정치연합이 ‘셀프디스’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신(Self)’과 ‘무례(Disrespect)'라는 두 단어를 합친 ʻ셀프디스’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왕년에 어느 코미디언이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개그로 관객들을 웃겼듯 자아비판을 통한 정치적 제스쳐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먼저 문재인 대표는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로 스타트를 끊었고 박지원 의원이 “호남, 호남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문 대표는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강한자의 횡포에 더욱 강해지는 당 대표의 카리스마를 보여드리겠다”고 다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새정치연합의 ‘셀프 디스’ 구상은 당의 이미지를 일신하기 위한 발상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일단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그 취지는 탓할 일은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운동이 얼마만큼 진정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저 야당 대표로 강해 보이지 않는다는 여론이 있으니 광고전문가의 머리에서 나온 홍보성 카피를 연출하려 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홀리는 입발림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 카리스마를 말하는데 정치인이라고 해서 카리스마가 꼭 있어야 할까요. 카리스마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좋은 것 아닐까요. 문 대표는 수더분한 인상에 동네 아저씨같은 친근감, 민주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정직해 보이기까지 하니 그것이 큰 강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리스마가 없어 죄송하다니, 듣기 좀 미안스러운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카리스마로 미국을, 전 세계를 다스립니까. 시진핑 주석이 카리스마로 13억 중국을 다스리고 있던가요. 히틀러 같은 카리스마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건 진정성입니다.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투철한 민주주의 정신과 국민에 대한 신뢰성입니다. '카리스마'랍시고 얼굴에 힘을 주고 독선으로 하는 정치는 바람직한 정치가 아닙니다. 그건 독재자의 한 유형일 뿐입니다.

홍보를 위해 광고전문가가 각색을 해서 쇼를 연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소주이름을 잘 지어 모셔왔다는 그 자체가 국민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국민은 소주가 아닙니다. 그거야 말로 야당에 인물도, 아이디어도 없다는 반증입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성공을 바랄 뿐 입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뭡니까. 워싱턴에서 전해 오는 여당 대표의 기행(奇行)말입니다. 차기 대통령후보로 유력한 집권당의 대표가 국회의원들과 몰려 가 참전용사들 앞에 무릎을 꿇고 줄을 지어 넙죽 떼 절을 하는 모습이라니, 과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모습은 내 평생 해외토픽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하였던가. 1883년 외교사절로 미국에 간 민영익 일행이 아서 미국 대통령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는 132년전의 처절한 모습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차기 대권주자로 미국 사람들에게 확실한 ʻ눈도장ʼ을 찍기위한 쇼였겠지만 과했습니다. 많이 오버한 것입니다. 70년 전의 고마움은 그동안 많이 표했습니다. 값기도 했고요. 미국인들도 놀라 웃었다고 하니 참으로 창피합니다. 이래 저래 재미없이 짜증만 나는 국민들을 더 짜증나게 합니다. 왜 자꾸 이럽니까. 더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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