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 판 <부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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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판 <부림사건>
  • 이정식
  • 승인 2014.01.2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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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11)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에 있어 가장 커다란 사건은 뭐니뭐니 해도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뻬뜨라셰프스끼 사건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까지 갔다가 형장에서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졌다는 얘기는 앞서 한 바 있다.
뻬뜨라셰프스키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최근 관람객 1천만명을 넘어선 영화 <변호인>을 연상시킨다. <변호인>은 1980년대 초, 5공화국 시절 체제 안정을 위한 희생양으로 부산에서 독서모임을 갖던 청년들을 고문을 통해 용공세력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한 부림 사건을 다소의 허구를 섞어 영화화 한 것인데 뻬뜨라셰프스끼 사건도 전말이 비슷하다.

▲ 영화 변호인 포스터

뻬뜨라셰프스끼 사건

도스또예프스끼는 1845년에 발표한 <가난한 사람들>이 성공을 거둔 다음해인 1846년 뻬뜨라셰프스끼라는 사람을 알게되어 그가 주도하는 문학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뻬뜨라셰프스끼는 뻬쩨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외무부에 근무하는 관리였는데 자기 집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 (J. Fourier 1772-1837)를 연구하는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 모임은 점차 체제비판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경찰이 이러한 움직임을 놓칠리 없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비밀리에 감시를 시작했다. 당시는 니콜라이 1세 치하로 그는 데카브리스트들을 처형 또는 유형 보냈던 인물이다. 늘 이러한 비밀집회 등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찰이 잠입시킨 한 끄나풀의 상세한 보고로 모임의 내용이 소상히 알려지게 되었고 경찰은 1849년 4월 22일과 23일 회원 34명을 전격 체포했다.
이 가운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형 미하일도 있었는데, 형은 가담정도가 경미하다고 하여 풀려났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관련자 23명 가운데 21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당시 모임 참석자들은 심각한 반체제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국은 이들을 엄벌함으로써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었다. 영화 <변호인>이 보여주는 부림 사건과 뻬뜨라셰프스끼 사건은 '독서 모임' '체제 안정을 위한 희생양 만들기' 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죄는 그가 4월 15일 모임에서 ‘전제주의적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1809-1852, 러시아의 작가)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벨린스끼(1811-1848, 당대 러시아 최고의 문학비평가)의 편지를 낭독한 죄였다. 다시말해 당국이 금지하고 있는 벨린스끼의 사악한 편지를 퍼뜨린 죄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폴란드인 야스뜨르젬브스끼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그 편지를 낭독할 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고 하여 역시 중죄인이 되었다.

▲ 벨린스끼 (1811-1848)

그렇다면 왜 그 편지가 문제가 되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골은 1836년에 초연된 <검찰관>으로 유명한 작가다. 러시아 관료 사회의 속물성과 부패를 유쾌하게 풍자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불멸의 코믹 풍자극이다.
푸쉬킨보다 10년 아래였던 고골은 푸쉬킨과 자신이 러시아 문학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30후반부터 작품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47년 <친구들과의 서신교환 선(발췌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 그의 정치적 종교적 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전까지 그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로 알았던 지식인들은 그의 이 편지 모음집을 보고 충격과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당대 러시아의 커다란 문제로 생각했던 전제주의와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농노제를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벨린스끼는 고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공개서한 <고골에게 쓴 편지>를 발표한다. 벨린스키는 고골이 예의 ‘친구들과 주고 받은 서한’에서 교회와 국가에 복종할 것을 설교함으로써 러시아 국민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벨린스끼는 이 편지를 쓴 다음해인 1848년 37세로 사망한다,)
고골의 문단에서의 입지는 위축될대로 위축됐다. 고골은 그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정신적으로도 이상 상태가 되어 1852년 단식으로 생을 마친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그 편지를 낭독한 죄의 대가는 너무나 컷다. 그러나 그러한 쓰라린 경험이 그를 대문호로 이끈 운명적 밑걸음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다소 위안이 될 것인가. (이후 12편 ‘<전쟁과 평화>와 데카브리스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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