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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의 추억' 울려퍼진 하얼빈의 정률성기념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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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의 추억' 울려퍼진 하얼빈의 정률성기념관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5/07/19 [19:27]

'매기의 추억' 울려퍼진 하얼빈의 정률성기념관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5/07/19 [19:27]

 

▲ 하얼빈의 음악가 정률성기념관

중국 3 대 음악가 중 한사람

중국의 3대 음악가중 하나로 꼽히는 정률성(1918 ~ 1976). 그는 한국의 전남 광주 출생이다.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는 그를 기리는 ‘인민음악가 정률성기념관’이 있다. 정률성기념관은 하얼빈의 명동이라고 불리우는 중앙대로 끝부분 송화강변 가까이에 있다.

기념관에 들어가니 한국말 노래가 들린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유명한 미국 민요 <매기의 추억>이다. 50대 이상 나이든 분들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서 모르는 이가 없는 노래다.

중국의 대 음악가 기념관에 한국가사로 된 미국 노래를 종일 트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작곡가일 뿐 아니라 성악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육성으로 남아있는 노래가 한국어 가사로 된 <매기의 추억> 뿐이란다. 그래서 종일 그 노래만 트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감격스럽다. 중국정부에서 만든 인민음악가 기념관에 귀에 익숙한 한국말 노래가 울려퍼지니 어찌 그런 감상이 아니들 수 있겠는가?

정률성 기념관을 하얼빈에 만드는 데는 하얼빈시 문화국 부국장인 조선족 서학동씨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던 북경의 고(故) 정률성 선생의 딸 등 유족들을 설득하고 하얼빈 당서기의 허락을 받아 정률성기념관을 만들었다.

나는 지난 7월 11일 한국에서 간 ‘안중근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의 일원으로 이곳에 처음 들렀었다. 하얼빈에 가는 분들은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뿐만 아니라 정률성 기념관도 한번 둘러보면서 <매기의 추억>을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음악가 정률성 초상화

정률성은 1918년 8월 13일 광주에서 출생(한국에서의 이름은 정부은),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형들을 따라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상해 등지에서 작곡과 성악을 배웠다.

1937년에는 중국공산당 본거지였던 연안의 로신(魯迅)예술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입당, <연안송(延安頌)> <팔로군 군가> 등을 작곡, 발표하였다. 그후 <팔로군 군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지정되었고 1988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확정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후 북한에 들어가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했다. 중국에서는 가곡, 가극, 영화음악분야 등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정률성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10월 중국으로 되돌아가 중국 국적을 취득한후 다시 한국(북한)에 나왔다가 이듬해인 1951년 4월 중국으로 아주 들어갔다.

(하얼빈에서 가이드는 안중근의사 탐방단 일행에게 정률성이 북한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이 남로당을 만든 박헌영을 숙청할 때 그도 함께 숙청 당할 뻔 했으나 다행히 중국으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의 부인이 당시 주은래 중국 총리의 수양딸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다른 기록들과는 편차가 있었다.)

정률성은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사망, 혁명음악가로 추앙되어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정률성기념관 내부
▲ 정률성기념관 내부, 음악가 정률성의 작품 목록이 연도별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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