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민나 도로보데스
상태바
[칼럼]민나 도로보데스
  • 김영회 언론인
  • 승인 2015.06.12 2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6개 지역 군수를 거쳐
1천 만평의 땅을 소유했던
‘조선의 땅부자’ 김갑순.
하지만 그가 남긴 건
 친일파 명단뿐"

 

이름도 생소한 메르스 광풍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불쑥 나타난 괴질이 일파만파로 국민을 공포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건 근래에 왜 이렇게 변고가 잦은지 모르겠습니다. 잊을만 하면 뭔가 터지고 또 터지고 정부는 우왕좌왕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만 하니 글쎄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기세가 등등하던 1982년 봄 전국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거부실록 ‘공주갑부 김갑순.’ MBC에서 방영한 이 연속극은 탤런트 박규채 씨가 개성미 넘치는 연기를 보였고 소재도 재미있었을 뿐 아니라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슬로건이 온 사회를 뒤덮고 있던 당시의 시국상황과도 맞물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도 못 다닌 어려운 처지를 이겨내고 충청남도 여러 지역의 군수를 역임하는가 하면 대전 땅 절반을 손에 넣을 정도로 큰돈을 모았던 거부 김갑순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는 주인공 김갑순이 입만 열었다하면 “민나도로보데스!”를 연발합니다.

그는 순사(巡査․경찰)에 뜯기고 세리(稅吏)에 뜯기고 깡패에 뜯기고 여기저기서 마구 뜯기기만 하자 말끝마다 ‘민나도로보데스’ 소리를 습관적으로 내뱉곤 했던 것입니다.

‘모두다 도둑놈’이라는 뜻의 일본 말인 민나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는 이내 저녁 술자리의 화두가 되고 시중의 유행어가 됐습니다. 그 시절 역시 사회 곳곳의 부패가 심했던 데다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찬탈이 ‘도둑질’로 인식되던 터라 그 몇 마디는 시대상을 절묘하게 꼬집은 패러디가 됐던 것입니다. 시청자들은 김갑순의 푸념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김갑순(金甲淳)은 187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장터에서 국밥장수를 하는 편모슬하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주감영의 관노(官奴․잡부)로 들어가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까지 지내는가 하면 1천 만평의 땅을 소유할 만큼 ‘조선의 땅부자’로 불린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관노시절 하루에 몇 번 씩 사또의 놋요강을 씻어 몸으로 한기(寒氣)를 녹여 대령하는 등 지극한 성실성으로 신임을 얻은 그는 우연한 기회에 묘령의 여인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의남매를 맺게되고 그녀가 관찰사의 소실(小室)로 들어가면서 출세 길이 열립니다.

그녀 덕에 감영의 아전(衙前․하급관리)으로 들어가 발판을 쌓은 그는 돈으로 부여군수자리를 사는 것을 시작으로 논산, 공주, 임천, 김화 등 6개 지역의 군수를 역임하고 한일합방 직전 종2품 가선대부라는 벼슬자리에 오르는 고속승진을 거듭합니다.

김갑순은 관직재임 중 땅 투기, 세금 횡령 등 갖은 수법으로 재산을 모았고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해 오면서 미리 사 놓은 땅값이 폭등해 눈덩이처럼 재산을 늘립니다. 그가 서울엘 갈 때면 반은 남의 땅을 밟고 반은 자신의 땅을 밟고 간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지금 도시가 된 유성온천과 온양온천이 그의 투자로 개발이 시작됐다고 하니 이재(理財)의 귀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본명은 원래 ‘순갑’이 였으나 고종황제가 앞뒤를 바꿔 ‘갑순’으로 개명해 줬다고 하는데 당시 그가 거느린 소실만도 1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금으로 만든 명함갑을 일본인 고관에게 선물 한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1906년 ‘김갑순이 공주군수에 임명되자 지방유지들이 일제히 일어나 “문벌이 깨진 세상이기는 하나 세칭 사대부로서 어찌 관노 따위에게 ’소인‘ 운운(稱小人)하며 굽실거릴 것인가”하고 들고 일어나 반대운동을 폈다’고 대한매일신보는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그가 공주를 떠나 대전으로 이사 가던 날 촌로들은 “당신이 떠나면 공주는 망합니다. 영감님, 못 가십니다”하고 길을 막았다고 합니다.

미천한 신분에 감영의 노비로 출발해 권세도 얻고 거부가 되었던 김갑순은 세금을 횡령하고 땅투기로 욕을 먹었지만 길도 닦고 다리도 놓는 등 자선사업도 많이 해 지금도 충청남도 여러 곳에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서 있습니다. 그는 1961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드라마는 ‘민나도로보데스’가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정권의 비위를 건드렸고 결국 도중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에 나선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주도세력이 ‘도둑놈들’이라는 몇 마디에 양심이 찔려 강압으로 중단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럼 30년이 더 지난 지금 다시 그때 그 드라마를 재방송한다면 국민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모르면 모르되 여전히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을까. 정치권, 공직사회 할 것 없이 온 나라의 부패가 변함없이 그대로 이니 지금이라고 국민의 반응이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사회는 대통령이 “부패덩어리를 뿌리뽑고야 말겠다”고 호된 성명을 낼 정도이니까.

김갑순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각종 어용단체에 참여해 친일활동을 계속하며 재산을 지켰으나 해방이 되고 1949년 농지개혁, 1953년 화폐개혁, 그리고 자손들 간의 재산분쟁 소송 등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조선의 땅부자’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의 많은 재산과 명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곤 친일반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704인의 친일파 명단’에 오른 때 묻은 이름 석 자 뿐 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