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하루전에 거북선 완성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이 때부터 만약에 있을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갔다. 거북선 건조에 착수한 것도 그 중요한 하나다. 거북선은 모두 3척이 건조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우연하게도 거북선은 임란 발발 하루전에 완성됐다. 거북선 안에서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시험 발사한 날이 왜군이 부산 연안에 상륙하기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이었다. 왜적은 4월 13일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채 부산 연안에 상륙해 20일만에 한양을 함락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천리하고 하는데 이는 쉬지않고 하루에 50리씩 달려갔다는 얘기다. 현대전에서도 보병이 50리 즉 20킬로미터를 완전군장에 도보로 20일간 계속 주파하는 것은 강행군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것이다. 당시 길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한 속도는 쾌속질주라고 아니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동래성에서 혹은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군과 대적했을 때도 그저 한나절 지체한 정도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이순신, 왜군 상륙 이틀후 전쟁 발발 소식 들어 이순신 장군이 전쟁 소식을 안 것은 왜적 상륙 이틀후인 4월 15일이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부산진 함락 통보가 왔고, 18일에는 다시 원균으로부터 동래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장래에 있을 전쟁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온 상태이지만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전투준비를 해나간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발발을 알게된 4월15일 술시(오후8시)에 임금에게 1차 장계를 올려 출전 명령을 기다리며 사변에 대비하고 있음을 알리고, 경상순찰사, 병사, 전라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낸다. 이와 동시에 관하 관·포에 탐망하고 정비할 것을 긴급 시달하고 신병 7백명에 대한 점점을 실시한다. 이후 4월 26일 선조로부터 ‘물길 따라 나가 적선을 무찌르라’는 첫 번째 유서를 받고 이어 다음날인 27일 ‘원균과 합세해 적을 무찌르라’는 두 번째 유서를 받는다. 당시 전라좌수사의 본영은 여수에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여수를 떠나 첫 출정길에 오른 것은 한양이 함락 당한 다음날인 5월 4일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전에 앞서 경상도 순병사 이일과 관찰사 김수, 우수사 원균 등 관할 밖의 장수들에게도 전락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묻고 급히 회답을 구하는 한편 부하 장수들로 하여금 부근 섬을 정찰하게 하여, 짧은 시간에 각 도의 물길 형편과 군사들이 모일 지점, 또 현재 적선의 수효와 적들이 정박한 장소에 이르기까지 전락에 필요한 모든 정부를 수집했다. 당시 적의 전함은 무려 500척, 아군의 전함은 불과 20여척이 조금 넘는 비교할 수 없는 열세였다. 그러나 이같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이순신 장구는 늘 철저히 준비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그 후의 대소 23차례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실용주의적 인재관 경상도 수군이 개전 초기에 괴멸상태에 빠짐에 따라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상대해야할 왜군 수군 전력은 전함 500여척에 총 9200명 가량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수군이 나고야를 떠나 부산포에 닿은 것은 개전 2주후인 4월 27일이었다. 왜군 수군의 전략은 한반도의 남해안을 끼고 서쪽으로 항진하여 먼저 상륙한 육군에게 추가 병력과 군수품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육군과 수군이 호응해 가며 북진을 해가는 이른바 수륙병진전략이다. 왜의 육군이 육로로 북상하고 수군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해와 서해안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 함께 한양에 들이닥칠 경우, -비교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반대의 상황이지만 6.25때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강 이남은 하루 아침에 왜적의 손에 떨어지고 명의 원군을 기다릴 시간도 없이 전 국토가 유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남해 해로를 지키고 있던 이순신 장군의 역할은 그야말로 중차대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순신 함대와 왜의 수군과의 생사를 건 일전은 불가피했다. 더우기 원균의 경상수군이 개전 초기부터 괴멸되어 경상 해로를 통째로 왜적에서 내어준 상황이었으므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 해군과의 첫 해전을 치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출전에 앞서 이순신 장군은 정신무장을 확고히 하여 전투 의욕을 최고조로 오르도록 하는 것이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에 부하들과 자유로운 출전 논의를 통해 의견을 한데 모으고 결의를 다졌다. 사람을 쓸때도 이순신 장군은 오직 능력과 실력에 따라 썼는데, 때로는 파면당한 사람도 쓰고, 정보를 얻고자 할 때는 포로도 머슴도 가리지 않고 썼다. 진영을 짜고 장수를 배치할 때도 개개 장수가 가진 특성과 실력을 위주로 배치했다.
첫 승전고를 울린 옥포해전 이순신 장군은 마침내 5월 4일 첫 출전에 나섰다. 전력의 열세 때문에 이억기 장군이 이끄는 전라우수군과 함께 출병하려고 했으나 이억기 장군이 이끄는 전라우수군의 도착이 늦어져 전라좌수군 만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이 때 이순신 함대의 전투선은 판옥선 24척 뿐이었다. 영화 ‘명량’에도 나오지만, 이순신 장군은 출발직전 왜적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도망간 여도 수군 황옥천의 목을 베어 군중에 높이 매달아 군율의 지엄함을 알렸다. 영화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목을 베는 장면이 나오는데 장군이 실제 그의 목을 직접 베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순신 함대는 5월4일 첫날 밤을 거제 남쪽 소비포에서 보내고 다음날인 5일 경상도 수군과 만나기로 약속한 당포(현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갔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나타나지 않았다. 원균은 다음날인 5월6일 아침에야 어부의 복장으로 이순신 앞에 나타났는데, 4월 18일 거제의 우수영 본영을 불태우고 함선들을 불태우고 함선들을 수장한 다음 사천, 한산도 등에 숨어있다가 이날 비로소 이순신 장군에게 온 것으로 보인다. 원균의 뒤를 이어 모두 9명의 경상수군의 장수들이 판옥선 등을 몰고 이순신 장군에게 의탁해오는데, 이순신 장군은 자신에게 의탁해 온 경상 수군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각자의 소임을 주고 굳게 승리를 다짐하면서 첫 해전을 치를 옥포만을 향해 나아갔다. 옥포만에 조선 수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왜군은 점령한 지역의 민가에서 살인, 방화,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조선에 수군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 듯 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조선 수군 앞에 왜의 수군은 해안으로 배를 몰아 육지로 달아나려다가 조선수군의 총통화기 세례를 받고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5월7일부터 8일 이틀간에 걸쳐 이순신 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 등 세곳에서의 접전에서 적선 총 42척을 격파했다.( 김종대 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참조)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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