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아침, 사형집행에 앞서 수인복을 벗고 고향에서 보내 온 흰색 두루마기와 검은색 바지의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여순감옥 사형실에서 구리하라 형무소장이 사형집행문을 낭독하고 안 의사에게 최후의 유언을 물었다. 안 의사는,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하여 동양 평화에 이바지 하기 바란다"면서 나와 함께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런 제안이 통할리 없었다. 안 의사가 혼자 "동양 평화 만세"를 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형리들은 안중근을 저지하고 그대로 교수형을 감행했다. 감옥 밖에 와있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감옥소 측은 가족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안 의사의 유해를 감옥 뒤의 수인 묘지에 몰래 묻었다. 안 의사의 유해가 조선인의 손에 넘어갈 경우 안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앞서 안 의사는 감옥으로 면회를 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내가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으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동안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 등 뜻있는 분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광복 70년이 된 오늘까지 유해가 뭍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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