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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목과 증오의 시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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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목과 증오의 시대

김영회 언론인 | 기사입력 2015/05/22 [16:26]

반목과 증오의 시대

김영회 언론인 | 입력 : 2015/05/22 [16:26]

"시기하고 미워하고
반목하고 대립하다 보면
그것이 증오심으로 변하고
결국은 폭력으로 이어져
사회를 혼란시킨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카인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장남 카인은 아버지 아담이 동생 아벨을 편애하는데 화가 나 동생을 들판으로 유인해 돌로 쳐 죽입니다.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인 동시에 인간이 증오심으로 인간을 죽인 첫 번 째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화이긴 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심을 품으면 해코지로 이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집니다, 인종과 인종, 민족과 민족이 반목하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종교와 이념,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가 있은 이래 인간은 대립하고 반목하며 온갖 구실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에 의하면 “인류는 역사의 93%를 전쟁을 해왔고 나머지 7%기간만이 평화시였다”며 “그 평화도 다음전쟁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다”고 개탄했습니다.

미국 역사학자 월리암 듀란트는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나 다름없습니다.

종교전쟁, 인종전쟁, 영토전쟁, 식량전쟁, 자원전쟁, 노예전쟁, 식민전쟁, 이데올로기전쟁 등 인류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쉬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왔고 지금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모순되게도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 궤변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동종살륙(同種殺戮)이라는 잔혹성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동물은 같은 종에 대한 증오심이 없으나 인간은 증오심을 갖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히틀러의 600만 유태인 학살, 캄보디아 폴 포트의 킬링필드 200만 동족학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며칠전 일어난 예비군 총기 난사사건은 한 인간의 증오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지난 해 여름 동부전선에서 임모병장이 일으킨 난사사건이 잊혀지기도 전에 또 터진 이번 사건은 자식을 둔 부모들은 물론 사회전반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리겠다”는 이 젊은이는 극도의 증오심으로 자포자기한 채 기회를 엿보아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젊은이를 그처럼 ‘증오의 화신’으로 만들었을까, 누가 그에게 무차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했을까, 그것이 의문입니다.

물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범행의 배경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장본인의 정신적인 장애일수도 있고 불우한 가정환경일 수도 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좌절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으로서는 풀 수없는 어떤 절망이 증오로 바뀌고 그것이 총기 난사로 폭발한 것은 아닐까.

산업화에 따른 양극화 현상도 빼놓을 수없는 원인이 됐을 수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의 빈부갈등도 그 원인일지 모릅니다.

35년의 일제 식민지배와 계속되는 한․일 외교 갈등, 민족상잔의 6․25전쟁과 70년 동안 이어져 오는 남과 북의 적대관계, 상대를 적으로 보는 뿌리 깊은 군사문화도 이번 사건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의 역기능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는 증오심을 부추기는 웹 사이트가 몇 천 개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매스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간의 불화와 불신을 부추기는 TV드라마, 헐뜯기와 독설과 악담을 일삼는 ‘정치방송’, 이들은 마치 신바람이라도 난 듯 마구 시청자들의 증오심을 부추깁니다.

사회의 갈등을 조정해야할 정당들은 조정은 커녕 진영의 증오심을 자극해 정치의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표방하는 종교인구가 국민의 절반이 넘는다는데, 그런데 사랑과 자비는 어디로 갔기에 “다 죽이고 죽고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1950년대 국민소득 100달러 때도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3만 달러가 됐다는 오늘 우리사회는 왜 이처럼 갈등과 분열과 증오심이 확산되는 것일까.

군 당국은 “국민에 죄송하고 대책을 강구 하겠다”고 앵무새처럼 말 합니다. 국민들은 너무 자주 듣는 소리이기에 “아, 또 그 소리”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지금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런데 더욱 딱한 것은 사회를 이끌고 있는 이들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정을 맡고 있는 정치지도자, 사회각계 지도층, 종교계, 시민운동가, 모두가 나서야 합니다.

먼저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병들게 하는가, 그 원인을 찾아내 분석하고 처방을 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일회성 사고라고 그냥 넘기다가는 더 큰 일을 당하게 됩니다. 제2, 제3의 사건이 터진다는 말입니다.

더 늦기 전에 모두 다 나서서 사회개혁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제도도 바꾸고 관행도 바꾸고 의식도 바꿔야 합니다.

젊은이의 꿈이 오로지 출세하고 돈 많이 버는 것, 그것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더 가치 있는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느낄 수 있게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합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에서 증오심은 싹틉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그것은 필시 폭력으로 바뀝니다.

나 아닌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회가 돼야 합니다. 모두가 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평안한 사회, 그것이 선진국입니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국민적 증오심은 문화수준이 낮을수록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들은 아직 문화 수준이 낮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민족인데…” 그렇게 자위합니다.

원초적으로 인간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듯 시기와 질투,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함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5월 가정의 달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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