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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 시인 한하운과 화가 박영대: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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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 시인 한하운과 화가 박영대

김영회 / 언론인 | 기사입력 2015/05/03 [19:57]

보리밭 / 시인 한하운과 화가 박영대

김영회 / 언론인 | 입력 : 2015/05/03 [19:57]
▲ 보리밭 (전북 고창, 이호 작가 찍음)

"'보리'하면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시인 한하운, 화가 박영대.

그들은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한 사람은 '보리피리'를 읊고

한 사람은 평생 '보리'를 그립니다."

잔인한 4월이 가고 5월을 맞았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그러나 이 시절은 지난 날 우리 조상들이 눈물을 머금은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인고(忍苦)의 계절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수확한 쌀이 겨울, 봄을 지나면서 바닥이 나고 대용곡물인 보리가 익기만을 기다리는 요즘 같은 시기가 바로 ‘보릿고개’입니다.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짓던 지난 날 이 때야 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을 하던 시기였기에 보리 수확을 기다리던 백성들의 하루하루는 허기를 견뎌야하는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이면 양식을 구걸하는 떼거지 일가족의 모습이 눈에 띄곤 했습니다.

1930년 6월 7일자 동아일보가 '보리고개 못 넘어 죽을지경'이란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것을 봐도 당시 백성들의 기근(饑饉)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잘 나타내줍니다.

시인 한하운(韓何雲))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나온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별 고생없이 공무원생활을 하던 중 뜻하지 않은 나병(癩病)을 얻게 되면서 뼈아픈 인생 역정은 시작됩니다.

나병이란 레프로시병(일명 Hansen병)이라고 하는 전염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문둥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과 발이 곪아 터지는 흉한 모습이 되어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않을뿐 더러 사회로부터 도 격리됐던 아주 나쁜 질환입니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48년 남으로 내려온 한하운은 인천과 서울거리를 배회하며 문전걸식으로 목숨을 지탱하면서 글을 팔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 올시다. 어느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습니다. (시 '벌'중에서)-

그는 ‘한하운 시초(詩抄)’를 시작으로 ‘보리피리(49)’, ‘한하운 시 선집(56),’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58),’ 시집 ‘황톳길(60)’등을 잇따라 발표합니다. 문둥이라는 단 하나 이유만으로 온갖 굴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처절한 시어(詩語)로 독자들의 심금을 두드립니다.

그의 대표작은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 늴리리 /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 늴리리 /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 닐리리 /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 닐리리- (人?:이 세상, 幾山河:수많은 산과강)

나병을 얻기 전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아스라이 배어있는 이 시는 세상과 격리된 채 유리표박(流離漂迫)하며 인간세상을 그리워 하는 애절함으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보리피리를 불며 가도 가도 끝없는 방랑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그의 목 메임은 메아리가 되어 ‘황톳길’에 울려 퍼집니다.

그의 시 들은 천형(天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슬픈노래가 되었고 그가 염원했던 것은 단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서라도 ‘파랑새’처럼 훨훨 날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시를 쓰면서 서울 명동성당의 쓰레기통 옆에서 거적을 쓰고 잠을 자곤 하던 그는 설상가상 어느 못된 정치인의 모함을 받아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는 1975년 한 많은 삶을 뒤로하고 생전 자신의 염원대로 ‘파랑새’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남긴 ‘보리피리’는 한 시대, 한 지식인의 불우한 삶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심어 놓았습니다.

송계(松溪) 박영대(朴永大).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보리화가’라는 별칭이 붙어있습니다. 10대 어린 시절 그리기 시작한 보리를 70대가 된 지금까지 그려온 그이기에 '보리'라는 말만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이름 ‘박영대’가 따라붙고 이름에도 역시 ‘보리’가 따라 붙곤 합니다. 어느 새 ‘보리’는 숙명처럼 박영대의 대명사가 되어있습니다.

박영대는 KTX오송역이 멀지않은 금강 상류 미호천 근처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청소년시절 해마다 보리가 싹트고 자라는 것을 보면서 보리와 함께 성장하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보릿고개’의 쓴 경험도 했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마을 농민들의 척박한 삶도 보았습니다. 그가 그린 보리밭에는 그런 지난 날의 향수와 애환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박영대. 그는 자나 깨나 보리를 그렸습니다. 학교에서도, 고향에서도, 서울 인사동에서도 보리를 그렸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밤에도 쉬지 않고 보리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한결같이 보리를 그리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975년 국전입선을 시작으로 78년 중앙일보 백양회 대상, 91년 일본 동경전 대상등 큰 상도 여러번 수상했습니다. 유럽, 미국등지에서 전시회도 가졌고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작품도 소장돼 있습니다.

그가 창립한 한일 교류전은 올해 21회째를 맞았습니다. 매년 30여명의 두 나라 작가들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전시회를 통해 민간외교의 한몫을 해 오고 있습니다.

오는 6월 4일부터는 대통령 별장이 있던 대청호 미술관에서 일본의 원로화가 시라오 유지(白尾勇次?88)씨를 특별초청, 젊은화가 30여명이 참여하는 한일교류전을 가질 예정입니다.

지난 3월 청주서 개막한 '동아시아문화도시 2015청주'행사의 테마로 ‘보리’를 선정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중국의 칭다오(靑島), 일본의 니가타(新瀉), 한국의 청주시 등 세 나라 3개시에서 올 연말까지 동시에 열리는 동아시아문화축제 청주대회는 온통 보리로 채색됐다 할 만큼 박영대의 보리 일색으로 행사장을 꾸몄습니다.

이는 이어령 대회명예위원장이 “청주에 보리작가 박영대화백이 있지않은가”라는 제안에 따라 '보리'를 테마로 선정, ‘보릿고개 넘어 생명도시로’라는 타이틀로 행사가 치러지고있는 것입니다. 박영대의 보리는 이제 한국의 상징적인 문화콘텐츠가 된 것입니다.

박영대의 보리는 그동안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맷방석의 보리이삭에서부터 4월의 푸른보리 청맥(靑麥), 6월의 누런 보리 황맥(黃麥)을 넘어 이제는 추상(抽象)보리로 변했습니다. 세월 따라 연륜이 쌓이고 원숙의 경지에 오름에 따라 캔버스의 보리도 시대에 맞게 달관해 진 것일까. 끝없는 실험정신 때문일까.

초여름 강둑에 바람이 일면 출렁이는 푸른 보리는 파도를 이룹니다. 이때 줄기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후~하고 불면 ‘필~닐리리’소리가 납니다. 들녘에 실려 가는 그 애잔한 소리는 바로 한하운의 한이 서린 ‘보리피리’소리 그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지나 보리빛깔이 누렇게 바뀌면 들판은 온통 풍요로운 고향의 모습이 됩니다. 그제서야 힘든 ‘보리고개’를 넘고 주린 배를 채우던 것이 과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를 연명시켜준 고마운 곡식, 보리입니다.

경제가 좋아져 오늘의 신세대들은 굶주림의 고통을 알리 없고 더욱이 보리가 어떤 곡물인지조차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보리는 ‘귀하신 몸’이되어 맥주원료로 주가를 높이고 있고 허기(虛氣)를 달래주던 보리밥은 별미집에나 가야 맛볼 수 있을 정도의 특별메뉴가 되어있습니다.

웬만한 도시 근교에서는 구경하기조차 쉽지않은 보리밭은 이제 박영대의 그림에서나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그림 속 보리이삭 한알, 한알에는 그의 삶과 집념, 그리고 영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 송계 박영대의 보리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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