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지에서 모범적인 삶은 살아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이들이 좋은 인상을 남긴 덕에 후에 시베리아로 온 정치범들은 간수들이나 현지 주민들로 부터 비교적 관대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데카브리스트들 덕에 자신과 같은 정치범들이 유형지에서 다른 죄수들에 비해 관대한 대접을 받았다고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베리아의 최고 사령관이 귀족 유형수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며, 심지어 평민 출신의 다른 죄수들과 비교해 볼 때 매사에 그들을 관대히 대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분명했다 첫째로, 최고 당국자들도 역시 귀족들이었다. 둘째는 이전에 귀족 출신 유형수들이 매질을 거부하고 집행자들에게 달려들어 이것으로 인해 끔찍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가장 주된 요인인 듯한 세번째 이유는, 약 35년 전쯤 갑자기 귀족 유형수의 거대한 무리가 시베리아에 나타났으며, 이 유형수들은 30년 동안 시베리아 전역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재평가 되었기 때문에, 당국은 이미 오래된 관습과는 무관하게 일반 죄수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귀족 범죄자들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 419쪽) 감옥에서의 마지막 무렵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동안에는 가족들에게 편지도 쓸 수 없었고, 성서외에는 책도 읽을 수 없었으나 출옥 전 얼마간은 그런 것들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처음 대했을 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이상스럽고 동시에 마음 설레게했던 느낌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했다. “나는 겨울에 감옥에 들어갔으므로, 겨울에 들어온 것과 같은 날에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 마침내 오래도록 기다리던 그 겨울이 온 것이다! 이따금 나의 가슴은 자유에 대한 커다란 예감 때문에 깊고 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침내 형기를 채우고 감옥을 나왔다. 감옥에서 나온후 그는 족쇄를 풀기위해 곧장 대장장이에게 가야했다. 대장장이는 그를 돌려 세우더니, 뒤에서 그의 발을 들어 올리고는 족쇄를 부쉈다. “족쇄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 올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 그렇다.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457쪽)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주어진 자유는 제한된 것이었다. 또다시 4년간의 강제 군 복무가 기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54년 2월 중순 출옥하여 3월2일 시베리아의 세미팔라친스끄에 있는 제7대대에 사병으로 배치된다. 그는 1855년부터 <죽음의 집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다. 1862년에야 전체를 탈고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장르상으로는 <수기>에 해당된다. 작품 집필을 위해 감옥과 유형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었던 톨스토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여러 번 읽었고, ‘이것은 놀라운 작품이다’라고 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1866년 1월부터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1부와 제2부도 <러시아 통보>에 실리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당시의 제목은 <1805년>이었다. 두 작가는 이렇게 출판물에서 처음 만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으나 생전에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9편에 계속)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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