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4월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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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4월의 트라우마
  • 김영회 / 언론인
  • 승인 2015.04.1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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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 피리라"

4월. 산천에 꽃들이 만발하는 4월. 그런데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4월이 있습니다. 1960년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4․19혁명’의 달, 그 피어린 4월 말입니다.

'부정선거 다시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며 노도(怒濤)처럼 거리를 내달리던 ‘젊은 사자들’의 4월.

55년의 세월,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반세기 전의 일이지만 기억은 오히려 선명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곪은 상처가 터지듯 터질 것이 터진 것이요, 일어 날것이 일어 난 ‘축제’였습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자유당정권은 6․25전쟁의 상처 속에 51년 국민방위군사건을 필두로 거창양민학살사건(51) 발췌개헌안사건(52) 사사오입사건(54) 보안법파동(58) 조봉암사법살인(58)등등 숱한 파동을 일으키며 국민의 신망을 잃은데다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에 급기야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를 도화선으로 4․19라는 전대미문의 국민봉기를 맞이합니다.

그러잖아도 힘든 보릿고개에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민생, 만연된 부정부패는 언제이냐가 문제였을 뿐 시국은 시한폭탄처럼 일촉즉발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연임에 나선 자유당의 이승만대통령과 이기붕부통령후보, 민주당의 조병옥 장면후보가 대결한 정․부통령선거는 투표일을 15일 남겨놓고 조병옥후보가 신병으로 급서(急逝)함으로써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지만 이기붕의 당선이 위태로워지자 자유당은 전면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합니다.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동적인 구호로 국민들을 파고 들었고 이에 맞선 자유당은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로 맞섭니다.

선거는 공무원들이 노골적으로 동원된 가운데 기표한 투표용지를 미리 함에 집어 넣는 사전투표, 투표장에 함께 가며 감시하는 3인조 5인조, 투표함 바꿔치기 등…심지어 군에서는 공개투표로 부대장들이 충성경쟁을 벌이는 불법투개표행위가 자행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때가 되면 빠짐없는 각종 어용단체들이 나서고 영화배우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거리행진에 나선가운데 소달구지를 끄는 우마차(牛馬車)연합회까지 자유당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코미디를 연출합니다.

당연히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기 시작하고 이내 그것은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대구를 시발로 서울 부산 광주 제주 등 전국으로 항의시위가 확산된 건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 행방불명된 고교생 김주열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항 부두에서 주검으로 떠오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찰의 잔혹한 진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순식간에 절정을 향해 타 올랐습니다.

그러잖아도 서울시위에서 경찰의 발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에 “총은 쏘라고 준것”이라는 이기붕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으로 격분한 상황에서 김주열군의 죽음은 불에 기름을 부운 꼴이 된것입니다.

시위는 처음에 대학생들이 앞장섰지만 곧 고교생들이 뒤따랐고 시민들의 합세에 교수들까지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왔으며 심지어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나서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없는 상황이 되면서 진압을 위해 전방에서 출동한 군의 탱크위로 시민들이 올라가자 병사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는 광경마저 연출됐습니다.

상황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자 이기붕후보와 부인 박마리아, 차남 강욱 등 일가는 이대통령에게 양자로 보낸 육군소위 장남 강석의  권총에 의해 일가족 집단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최후를 선택합니다.

결국 ‘피의 화요일’이 된 4월19일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함으로써 이날 하루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 13명, 광주 6명이 사망했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합니다.

사상자가 마구 늘어나고 전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이승만대통령은 결국 26일 하야(下野)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40여일 넘게 계속된 전국적인 소요사태는 일단락이 됩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출범한 제1공화국은 이승만의 몰락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이승만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 29일 안개 자욱한 새벽 김포공항에서 몇몇 측근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인 푸란체스카여사와 함께 비밀리 하와이 망명길에 오릅니다. 종신집권을 꿈꾸던 독재권력의 마지막 모습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4․19혁명은 제 이름을 찾는데만 40년이 걸립니다. 4․19의거에서부터 4․19, 4․19사태, 4․19학생운동 등의 이름을 거쳐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비로소 ‘4․19혁명’이란  이름을 찾았던 것입니다. 1년 뒤 쿠데타 를 일으킨 군부세력과 기존의 보수 기득권세력은 ‘혁명’이란 글자 자체를 꺼려했던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4․19혁명’은 무엇이었나. 55년 전 그때 거리를 내 달렸던 ‘젊은사자들’은 지금 70, 80대 노인들이 되었고 많은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는 ‘4․19혁명’은 3․1절이나 마찬가지로 역사속의 ‘어떤 날’이 되었습니다.

1960년 2502만명이던 인구는 반세기만에 두배로 증가해 5100만명이 되었고 80달러이던 국민소득은 370배 증가해 3만달러가 될 만큼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했습니다. 국력은 크게 신장돼 세계10위권의 경제강국이 되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국민의 머릿속 의식과 정신세계는 얼마나 변하고 성숙해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꽃피워 오늘의 위대한 프랑스로 승화시켰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4․19혁명’ 55주년이 된 지금 어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 할수 있을지, 의문인 것입니다.

혁명이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라면 우리의 ‘4․19’도 그랬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시비는 사라지지않고 있고 온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는 백년하청(百年河淸)으로 뿌리 뽑히지 않고 있습니다.

좌우이념갈등은 1950년대를 방불하고 지역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역시 발등의 불이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4․19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미완의 혁명인가.

그때 질풍노도가 되어 거리를 내 달리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던 한 사람으로서 쉰다섯 번째 봄을 보내며 이 글을 씁니다.

서울 수유리 국립4․19묘지 기념탑에는 이렇게 새겨져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속에 정의를 위해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의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 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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