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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13):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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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13)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기사입력 2015/03/05 [22:37]

[연재] 세종, 조선 천년을 그리다 (13)

신현덕 / 언론인, 문학박사 | 입력 : 2015/03/05 [22:37]
▲ 즉위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사신들은 중국을 등에 업고 항상 큰소리를 쳤다. 사신들은 늘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밥 먹듯 했다. 호가호위는 중국 전국책에 나오는 말이다.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릴 때 쓰는 말인데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신들의 행동이 꼭 그런 모양새였다.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는 조선의 왕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했다. (1403년 4월 10일)태종 임금이 직접 태평관까지 가서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환관 황엄이 무례하게 굴어 일찍 잔치를 폐했다. 다음 날 사신들은 사과하기는커녕 임금 앞에서 지난번 한양에 왔던 사신이 중국에 돌아와 “자신을 박대한 것이 폐하를 잘못 모시는 것”이라는 뜻으로 고자질했다고 전한다. 자기들을 잘 모시라는 말을 에둘러 황제를 들어가며 빗대어 말했다. 태종은 황제에게 잘 이야기해 달라고만 부탁했다.

세종 때 다시 온 사신 황엄은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이라며 직접 황제를 거론했다. 황제가 길이 멀다 하고는 생견, 옷감, 살아 있는 양 1천 마리를 “술과 과일 값”으로 보냈으니 받고는 “왕의 나라(조선)에 있는 물건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라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다. 조선은 그 말을 들었으니 곧이듣거나 아니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뿐이랴. 또 다른 사신은 비단 2백 필을 건어물로 물물교환을 하자고 내놓았다. 조정이 나서 부랴부랴 어물로 바꾸어 주고는 돌아가라는 선물을 바쳤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뒤로 숨기고는 “그대들이 나를 경대하는 것은 황제를 경대하는 바이며, 내가 그대들을 경대하는 것은 전하를 경대함이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요즘도 이런 일을 하는 중국인들이 가끔 있다고 들었다. 한 중국 학자가 우리나라 어느 기관에 학술지원금 신청서를 제출했다가 탈락했다.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에게 일러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런 무례한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단단히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세종은 이런 갖가지 수모를 다 참으며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한번은 중국 사신들이 엉뚱하게도 해물을 요구하자 각도에 전하여 준비했다(1423년 8월 21일). 사신이 청구한 물건은 풍성하고 깨끗한 것으로 마련했다. 전라도는 해채와 은대구 마른 송이, 경상도와 함길도는 해채 말린 연어 은대구 송이 문어, 경기 충청도와 개성은 말린 송이, 강원도는 해체, 연어 송이 말린 문어를 진상했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세종은 정말 오랫동안 참았다가 붕어하기 1달 전(1450년 윤1월 19일)에 가서야 본심을 살짝 드러냈다. 사신들이 원하는 모든 물건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서 주던 세종이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때인데도 그간 얼마나 시달렸으면 사신들이 많은 물건을 요구하자 “사신이 비록 선비로서 이름을 얻었다 하나 실은 욕심쟁이로다”라고 말한다.

환관 윤봉의 힘

사신으로 온 환관 윤봉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다. 다른 면을 한 번 더 들여다 보자. 그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높고 등등했다.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 없어 보였다. 벼슬을 붙이고 높이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려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 신하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세종도 불편하기는 매 일반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유지하려는 마음에 그의 안하무인 태도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서흥 윤씨가 듣는다면 불편하겠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기록을 살펴보자. 윤봉은 그의 동생을 승진시켜 재상위치로 올리고 나중에는 동생이 서흥 윤씨의 시조가 되게 했다. 그가 가진 힘은 바로 그의 직책 때문이었다. 그는 중국 사례감 소속이었다. 사례감은 소속 태감이 황제의 직속 정보기관인 동창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동창은 관원과 백성의 동정을 몰래 살피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 요즘으로 친다면 이스라엘의 모사드, 미국의 CIA 등과 같은 국가정보기관인 셈이다. 이들 정보기관이 가진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동창의 위상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윤봉이 바로 그 태감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비록 조선에서 태어나 환관이 되어 명나라에 들어갔지만, 조선의 왕도 어쩔 수 없을 만큼의 권력을 누렸다. 그가 10여 차례 조선을 오가는 동안 조정은 그의 비위를 맞추면서 동시에 이익을 취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에게 주는 것과 그가 조선에 준 이익 중 어느 것이 컸을까는 독자들이 계산하는 것이 빠를 수 있다. 꼭 유형의 뇌물뿐이 아니라 무형으로 전해지는 압력이나 횡포를 쉽게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가문이 얻은 영광과 이익은 셈이 곤란할 만큼 엄청난 것은 확실하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감하게 도왔다. 중국에서 화살의 주원료인 물소뿔을 금수품목으로 정했을 때 제한적이나마 수입량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지금으로 친다면 미국이 가진 최신 무기의 부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하게 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또 조선이 늘 어려워하던 금은 세공을 면제 받게 했다. 농사에 꼭 필요한 소를 받치라는 것도 보내지 않도록 중국의 허락을 받아냈다. 농업 사회에서 소가 없으면 농사짓기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른 소득 감소가 불을 보듯 한데 이를 해결했다. 세수 확보와 백성의 복지에도 기여한 것이다. 그는 조선 왕실 문제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조가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후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냈다.

하지만 조선은 그가 뇌물 너무 많이 챙기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가문 사람들을 관리 등용시키는 등 폐단이 심해지자 대책을 강구했다. 세종은 중국에 환관이 아닌 조정의 신하를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 국내의 비밀 정보 습득과 동조자와 협력자를 관리해야하는 중국 정보기관의 결정이었다.

중국, 조선과 여진을 격리하다

동창 소속 사신들은 여러 가지 임무를 띠고 왔다. 오가는 길에 동정을 살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조선과 만주 지역의 세력이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역대 왕조는 그들이 북적(北狄), 즉 북쪽의 오랑캐라고 부르는 북방민족의 움직임이 언제나 최대 관심사였다. 만약의 경우였지만 조선이 여진과 결탁하여 중국으로 군대를 돌린다면 중국으로서도 방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이 번창했던 것은 농업세력인 한족과 유목민족인 북방세력이 합쳐졌을 때였다. 최대의 영토를 가진 원나라가 대표적이었다. 명나라는 원나라, 즉 몽골에 당했던 역사가 있어 항상 유목민족의 이동과 세력화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선이 만주이북의 유목 민족과 합세한다면 중국 한족이 담당했던 역할을 조선이 맡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중국은 그래서 세력화를 방지하는 방안 마련에 골똘했다.

중국이 윤봉을 자주 조선에 보낸 이유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중국의 오래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환관을 출신지역에 사신으로 보내 각 지방 세력의 내정을 염탐케 했다. 환관들은 주로 각 지역에 살 때 어려웠던 신분이었다. 그가 조선에 있었더라면 별 신분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황제를 모시는 높은 신분이 되었다. 중국은 이를 잘 활용했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언어도 같고 지리와 문물 풍습에 밝은 사람이다. 표정만 보아도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간파하는 능력도 있다. 윤봉이 조선에 오면 조선 조정과 대신이 그를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중국 사신이 트집 잡을 일이 없자 생떼를 썼다. 세종이 왕세자를 보내 중국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데(1429년 1월 4일) 갑자기 화를 냈다. 술잔이 여덟 바퀴가 돌아 얼큰해졌을 무렵 사신이 “은병을 잡은 자가 나를 비웃었다.”고 불쾌해 했다. 실록에 보면 어떤 설명도 없다. 그러고 보면 서비스 하는 사람이 실제로 웃은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취해서 고집을 부리니 시중드는 사람을 교체했다.

풍습이 다를 경우 어떤 행동을 해석해 내기가 불가능한 것은 지금도 같다. 중국은 당연히 조선 출신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윤봉은 중국내에서 정보요원이었니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결국 중국은 조선도 한 지방 세력이며, 어느 순간에는 견제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 영향은 아직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대학교 4학년 학생 6명의 졸업 논문을 지도했다. 그중 한 명은 보라는 듯이 중국과 조선 사이를 늘 종번(宗蕃)관계로 표기하곤 했다. 필자가 한국인이며 자기의 논문지도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종번을 주장했다. 조공관계로 의미를 순화하자고 했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끝내 바꾸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태도이기는 했지만 중국이 중심이고 우리는 변방의 번국(蕃國)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했다. 세종은 비록 번신이라고 스스로 칭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한 일을 보면 그렇다. 종번관계라는 말을 듣고 있기가 정말 거북했다.

한편 중국 학자들은 한국과의 관계를 눈치 봐가면서 적당하게 둘러대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서 연구비를 지원받는 학자들은 가능하면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비싼 연구비를 지원해 주며 단어 몇 개 바꾸는데 오래 걸렸다. 연구논문과 독자 수를 고려한다면 단어 하나 바꾸는데 엄청난 우리 세금을 지원한 꼴이다. 그래도 꾸준하게 이런 일을 펼쳐 나가야 한다. 중국내에 우리식으로 표현한 논문이 늘어 갈수록 후대 중국인은 명확한 한중관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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