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인민의 사랑받는 주은래 1976년 1월 15일 중국군 군용기 한 대가 천진(天津)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기체 아래 멀리 지상은 까마득히 산과 들이 펼쳐져 보였고 기내에선 몇 사람이 연신 상자에서 흰 가루를 꺼내 창밖으로 날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나라 중국의 제2인자로 국무원총리를 역임하다 몇일 전 타계한 전설적인 인물 주은래는 그렇게 한줌 재가 된채 사라졌습니다. 이날 행사는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을 해 조국의 산하에 뿌려달라”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위원장인 등소평(鄧小平)이 직접 관리들과 함께 허공에 재를 뿌리는 의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20세기 중국 현대사의 거목이었던 주은래(周恩來 1898∼1976)는 혁명가, 사회주의운동가, 외교관으로 일생을 불태운 위대한 정치가였습니다.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장개석 국민당정부를 몰락시키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 초대 국무원총리에 취임해 1976년 1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장장 27년동안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이끈 불세출의 인물이었습니다. 1934년 10월 모택동과 주은래의 홍군(紅軍)은 대륙 동남쪽 강서성(江西省)에서 70만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뜛고 사지(死地)를 빠져나와 대장정(大長征)의 길에 오릅니다. 말이 대장정이지 실은 국민당군에 쫓겨 단지 행군으로 11개의 성, 18개의 산맥을 넘어 2만5천리를 도망친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패주극(敗走劇)이었습니다. 이듬해 10월 368일만에 목적지 섬서성(陝西省) 연안(延安)에 도착했을 때 출발당시 8만6천명이었던 병력은 7천명으로 줄어들었을 만큼 지리멸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홍군은 계속된 위기 속에서도 대장정을 통해 농민들의 민심을 얻는데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부패한 국민당정권을 몰아붙여 대세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모택동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주은래는 중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주역이었습니다. 주은래의 정치역정(歷程)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지지만 끝까지 모택동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고 만년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는 점은 물고 물리는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 보여준 드문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주은래는 50년을 한결같이 모택동을 헌신적으로 보좌했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문화대혁명으로 궁지에 몰리고 사생활로 공격을 받았을 때도 그는 모택동을 떠나지 않았고 이를 수습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한번도 실각하거나 숙청당한 적이 없이 제 역할을 다하면서 마지막까지 위대한 2인자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생전에 모택동은 “주은래는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 순수하고 도덕적인 고귀한 사람”이라며 “인민해방을 위해 철저히 헌신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주은래는 절대권력을 쥐고 있었음에도 권력자로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포용력과 친화력으로 신망을 얻었고 지위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검소하고 청렴했습니다. 그는 평생 은행통장을 가져 본 적이 없이 청빈하게 살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산이라곤 단돈 5천위안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가 공사 구분없이 얼마나 철저한 삶을 살았는 가는 생활 철칙인 ‘주은래육무(六無)’에 잘 나타납니다. 첫째 사불유회(死不遺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는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는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 관직에 있으면서 드러내지 않는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 당원으로서 사사로이 행동하지 않는다. 다섯째 노이무원(勞而無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 죽을 때 유언을 남기지 않는다. 이 여섯 가지 ‘하지 않을 것’은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여실히 말해줍니다. 그는 혁명동지인 부인 등영초와 59년간 해로 했으면서도 후사(後嗣)를 남기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동지들의 자녀들을 데려다 길렀으며 그 중 한명이 뒤에 총리가 된 이붕(李鵬)이었습니다. 지금도 천진의 주은래기념관에 전시 된 유품중 재임중 기워 입었던 인민복은 관람객들을 숙연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여필종부랄까, 그의 부인 등영초(鄧潁超)역시 남편을 따랐습니다. 혁명동지로 평생 고락을 함께한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옷을 기워 입으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유언 또한 감동을 주기는 마찬가지. “내가 죽은 뒤 유해는 의학용으로 쓰고 남은 것은 화장을 하라”면서 “우리 내외가 살던 집은 국가에 귀속하고 일가친척에게는 어떠한 특혜도 줘서는 안된다”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합니다. 헌신적인 혁명가로, 노련한 외교관으로, 유능한 행정가로, 실용적인 정치가로 중국현대사애 남긴 그의 족적(足跡)은 매우 큽니다. 그가 보인 청빈하고 헌신적인 삶은 인민들을 감동시켜 장례를 마친 뒤에도 한 동안 천안문 광장에는 추모집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사망하자 유엔은 냉전 중이었음에도 이례적으로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적성국의 지도자였지만 위대한 인물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주은래를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소하(蕭何)나 삼국지의 제갈량(諸葛亮)에 견줘 농촌에서는 사당을 짓고 신으로 받들기까지 할 정도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조국인 중국을 사랑했던 사람 주은래. 그가 인민을 사랑했듯 인민들 역시 그를 사랑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주은래를 ‘은래동지’라고 부릅니다. 모택동을 ‘모주석’이라고 호칭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모택동이 북경의 천안문광장 모주석기념관에 방부처리돼 누워 있는 반면 주은래는 한줌 재로 그가 평생 사랑했던 조국의 산하에 뿌려진 것이 인민들의 감동을 사 진정한 인민의 벗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 속 인물이 되었지만 지금도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13억 중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국무총리 국회인준을 둘러싸고 한동안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것을 보면서 남의 나라이야기지만 국가지도자의 금도(襟度)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주은래에 얽힌 이야기를 돌아 봤습니다. 이 총리, 이제는 제발 ‘각하’소리 하지 마시길 왕조시대에는 오늘의 국무총리격인 영의정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 하였습니다. 좌의정, 우의정과 함깨 삼정승 가운데 으뜸인 영의정은 위로 오직 한사람 임금이 있을 뿐 아래에 만백성이 있다하여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국무총리란 자리는 그야말로 막강한 자리입니다. 헌법에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 각 부를 통할하는 행정부의 2인자라고 규정되어 있듯 2인자란 다름아닌 대통령 유고시에 그 자리를 자동적으로 일시 승계한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1979년 박정희대통령 유고(有故)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것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명장을 받은 이완구국무총리의 동분서주 재빠른 순발력이 눈에 띕니다. 부동산 투기의혹에 병역의혹, 언론외압 등등 털릴 것은 다 털려 민신창이가 된 상황이라서 실추된 명예를 빨리 끌어 올리려는 발 빠른 행보인 듯 싶습니다. 이제 와 얘기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충북출신인 내겐 ‘충청도 총리’라는 친근한 호칭이 솔깃했습니다. 하지만 청문회기간 동안 마구 터져 나온 갖가지 추문에 솔직히 낯이 뜨거웠습니다. 이총리의 각종 의혹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약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서 크게 탓 할 건 아닐지 몰라도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성이 많이 창피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과정이 어떠했든 이제 이총리는 마음을 비운 겸손한 자세로 명예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국민의 편에서 국민과 함께 하는 총리가 되어야 하는데서 가능합니다. 그러지 않고 국민위에 군림하면서 대통령 한사람의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한다면 명예 회복은 커녕 더 큰 오욕을 쓰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은 진정으로 힘없는 국민들과 애환을 같이 하는 ‘국민의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남들이 보는 공식석상은 물론 사석에서라도 제발 “각하! 각하!”하는 소릴랑 하지 말아주십시오. 개인의 인격은 물론 충청도 사람 자존심도 염두에 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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