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html on line 3
'세월이 가면'과 시인 박인환 (4):세종경제신문
로고

'세월이 가면'과 시인 박인환 (4)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5/01/27 [19:53]

'세월이 가면'과 시인 박인환 (4)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5/01/27 [19:53]
▲ 망우리 공원묘지내 도로변에 서있는 박인환 시비 앞을 지나는 등산객들

광복후 <마리서사> 서점을 열기도 

4남 2년중 맏이었던 박인환은 8살 때인 1933년 인제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1살때인 1936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 종로로 이주해 덕수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시 석차는 66명중 7등이었다. 1939년 초등학교 졸업후 바로 경기 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후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한성학교 야학을 다니다가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이해 곧바로 3년제였던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광복후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해 종로 3가 낙원동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다. 부인 이정숙(李丁淑)과는 1948년 결혼해 이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살았다. 1948년 자유신문사에 입사해 기자가 되었으며 1949년 경향신문사로 옮겼다. 1950년 6.25 전쟁 발발시 피난을 가지 못해 9.28 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 이해 12월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가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한 것은 1952년이다. 서울 세종로 옛집에는 1953년 7월에 다시 돌아왔다.

 

광화문 교보빌딩 뒤에 있는 박인환의 집터 표지석. 박인환은 여기에서 1948년부터 세상 떠나던 1956년까지 살았다.

표지석 내용

박인환 선생 집터

이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선시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박인환은 1955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으로 미국을 여행한 후 돌아와 조선일보에 이해 5월 13일과 17일에 <19일간의 아메리카>를 기고했고 그후 대한해운공사를 그만두었다. 이해 10월 15일 박인환 선시집(朴寅煥 選詩集)을 출간했다. 이듬해 세상 떠날 때까지는 그는 직업이 없는 상태였다. 심한 생활고를 겪던 중 만으로는 서른이 채 안된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사후 더욱 빛을 발했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노래 <세월이 가면>과 관련해 우연히 인터넷에서 파일럿 출신 수필가 조순제씨가 2010년 4월에 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제목의 눈물겨운 수필을 읽게 되었다. 여기에 간추려 소개한다.

[1950년대 후반 박인환 작시의 노래 <세월이 가면>을 언제나 흥얼거리던 J라는 공군 파일럿이 있었다. 나(조순제)와 비행교육을 함께 받았던 그는 생기기도 박인환처럼 훤칠한 미남이었다. 언제나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미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열흘 앞둔 어느 날 엔진 수리가 끝난 비행기에 - 평소 친절을 베풀며 가깝게 접근해 왔던 - 인접 부대 모 중위를 탑승시켜 시험비행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인접부대 중위가 비행기 뒷좌석에서 이 파일럿을 위협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다.

어떤 무기로 어떻게 위협을 당했는지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그 후 북한 방송에서 모 중위는 의거 귀순했다고 영웅처럼 떠들었는데, J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가족들이 50년이 지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 명단에 J씨를 올렸으나 북으로부터 병사했다는 단답밖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고 한다.

J 씨의 약혼녀는 데보라카를 연상시키는 미모였다. 이 사건 후 그녀는 초혼도 재혼도 실패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부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요양병원 정신신경과에 입원해 있는 이 여성을 방문했다,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였다. 과거 약혼녀의 친구였던 나를 보자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그리곤 조용히 창문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읽으면서 기분이 울적하였다. 어처구니 없는 운명의 이야기다. 그 노래 <세월이 가면>...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러온 노래였을까. 우리는 오늘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이같은 분단의 아픈 상처들을 목격하고 있다. (계속)

  • 도배방지 이미지

포토/영상
이동
메인사진
무제2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