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의 시베리아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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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의 시베리아 유형
  • 이정식
  • 승인 2014.01.1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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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5)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지에서 어떠한 생활을 했는가는 시베리아 유형생활의 경험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1821-1881)의 수기 <죽음의 집의 기록>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시작한 것은 1826년부터이며 도스또예프스끼가 옴스끄에서 유형생활을 한 것은 1850년부터 4년간이므로 20년 이상의 차이가 있지만, 유형지의 상황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죄는 체제비판죄였다. 데카브리스트들처럼 그도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가정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근검절약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공병학교에 들어간 다음해인 1839년 농노들에게 살해됐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공병학교 수학 중 하사관으로 임명돼 소위까지의 군 복무를 하고 22세 때인 1843년 공병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공병국 제도실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결국 토목 기술자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나서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전체정치에 비판적인 반체제 문학 모임에 비밀리에 참석해 활동하다 1849년 4월 체포됐다. 문학 모임에서 ‘전제주의적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1809-1852, 러시아의 작가)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벨린스끼(1811-1848,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의 편지를 낭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관련자 23명 가운데 21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사형장에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지는 상황은 극적이다.
옛날 한국영화에서 금부도사 앞에서 사약을 받아들고 마시려는 순간 말을 탄 관리가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나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집행을 중지시키는 장면과 비슷하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가 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군법회의에서 내린 사형 판결은 바뀌었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하는 듯한 쇼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젊은이들에게 두려운 인생의 교훈을 준다는, 잔인하면서도 그러나 소박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지 단순히 그의 넓은 자비심을 보이려는 황제의 허영심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사형 중지 결정을 알지 못했던 죄수들은 마차로 처형장까지 갔다. 사형 선고문이 읽히고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마지막 참회를 말하라고 했다. 죄수들은 순서대로 줄을 섰고 앞의 세 사람은 실제로 기둥에 묶여 사격대를 향했다. 이때 황제의 감형장을 가진 전령이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짜 선고문이 처음으로 읽히고 죄수들은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66쪽, E. H. 카 지음, 김병익 ․ 권영빈 번역, 2011년, 열린책들)

극적인 대목임에도 묘사가 평범해서 흥미진진한 맛이 없다. 도스또예프스끼도 그의 글을 통해 당시 사건관련 부분을 몇 차례 서술하기는 했다는데 일관성과 명료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E. H. 카의 지적이다. 그래서 묘사가 밋밋한지도 모르겠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E. H. 카 가 1931년에 펴낸 것이다. 사형선고는 이로부터 82년 전의 일이다. 아무튼 이 극적인 사건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 감형된 사람 중 두 사람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감형 이후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사형에서 강제노동 4년, 군 복무 4년으로 감형되어 즉각 뻬쩨르부르크에서 옴스끄로 이송되었다. 유형수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뚜껑없는 썰매에 실렸다. 1849년 12월 24일 밤, 집집마다 촛불을 밝히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살을 에이는 추위와 어둠을 뚫고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유형지를 향해 떠났다.

“그로부터 7일간 여행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영하 40도가 되었다. 우랄 산맥을 넘을 때는 눈사태 때문에 몇 시간을 기다려야했다. 이럴 때는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남자로서는 흘려서는 안 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들의 배후에는 유럽과 과거가 있고 앞면에는 아시아와 미지의 미래가 있었다. 언제나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따뜻한 옷가지가 넉넉지 않아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두 명의 동행도 동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또볼스끄에서는 6일간을 머물렀다. 여기서는, 1825년의 음모에 가담했던 데카브리스트 당원의 몇몇 생존자의 아내들이 죄수들을 찾아왔다. 이 여인들은 남편의 뒤를 좇아 시베리아로 와서 25년간을 머물고 있었다. 이 여인들로부터 도스또예프스끼는 돈과 음식과 옷가지를 선물로 받았고 죄수들에게 공식적으로 소유가 허락되는 유일한 책인 성서를 받았다.
또볼스크에서 (동행했던) 야스뜨르젬브스끼는 떨어져 남게 되고 도스또예프스끼와 두로프는 사흘간의 여행을 끝낸 뒤 옴스끄 감옥에 도착했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68쪽) (6편에 계속)

▲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풍경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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