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 김억 소월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다닐 때 그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사람은 스승 김억(김억, 1896~1950?, 납북) 시인이었다. 소월은 스승 김억의 지도 아래 시작에 열중하였고 주옥같은 시들을 썼다. 그러나 1919년 3.1 독립운동 후 민족운동의 온상으로 지목 받았던 오산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교됨에 따라 졸업예정자였던 소월은 이해 졸업장을 받고 1922년 서울의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할 때까지 2년 이상 집에서 머물게 된다. 배재에 편입하던 그해 소월은 <개벽>을 통해 <진달래꽃>등 많은 시를 발표한다. 20세 전후였던 이 무렵이 소월의 시작(詩作)활동의 전성기였다. 배재학교 졸업 이듬해인 1923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이때부터 소월은 일경의 감시속에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게 된다. 소월의 최후 소월의 최후와 관련해 1966년 북한의 주간 <문학신문>은 김영희 기자의 정주 곽산 취재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34년 (소월은)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단실은 의외의 변고에 억장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 봉지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숙모 계희영의 기록도 이와 비슷하다. 1930년 가을 곽산에서 치러진 숙모의 맏딸 결혼식을 끝내고 숙모와 오랜만에 마주 앉았을 때 소월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숙모도 같이 울었다.
소월이 남산리에서 구성으로 이사갈 때는 원래 목적이 산골에 파묻혀 조용히 글이나 쓰며 경찰의 간섭을 피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순사가 찾아와서 “왜 직업이 없는가? 글을 쓰면 발표하라”고 말하면, 소월이 “발표할만한 것이 못 되오”하였으나 순사는 소월이 글 쓴 작품을 모조리 가지고가서 일일이 심문을 하였으며 별로 책잡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도, “이렇게 합시다”하며 소월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불에 던져 태웠다. 이렇게 자기가 쓴 작품들이 불에 던져질 때 소월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으므로 쌓이고 쌓인 설움이 숙모를 보자 터져 버린 것이었다.
소월은 세상 떠나던 해 가을, 살고 있던 구성에서 곽산 남산리 고향에 돌아와 조상들의 묘에 성묘하면서 떼가 벗겨진 무덤에는 떼를 입히는 등 무덤을 일일이 다듬고 구성으로 돌아갔다. 전에는 추석 때도 선산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이때 자살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장에서 생아편을 사가지고 왔다. 그날(1943년 12월 23일) 밤도 부인과 마주앉아 술을 따라 마시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술에 취한 색시는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잠결에 남편인 소월이 무엇인가를 입에 집어 넣어 주기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소월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고 소월의 처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기른 소월>. 계희영, 장문각, 1969)
소월은 불과 32세에 이처럼 안타까운 최후를 마쳤다. 나라 잃은 식민지의 백성으로서의 한을 품고 세상을 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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