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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불운한 말년: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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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의 불운한 말년

소설 <유정>의 무대 '바이칼' (9)

이정식 | 기사입력 2013/12/27 [12:51]

춘원 이광수의 불운한 말년

소설 <유정>의 무대 '바이칼' (9)

이정식 | 입력 : 2013/12/27 [12:51]
▲ 알혼섬(바이칼 호수 안의 섬)에서 본 바이칼 호수 주변의 산들.

이광수(1892-1950)가 소설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할 때(1933년)만해도 그의 가슴 속에 조국 조선의 독립에 대한 간절함이 남아있었음을 소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0살 때 괴질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한 이광수는 10대 때 서울로 올라온 후 개화사상에 눈을 뜬다.
총명했던 그는 1905년 일진회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데 이때 일본에서 최남선(1890-1957), 홍명희(1888-1968) 등을 만나 교유하며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광수는 1910년 귀국해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치던 중 1913년 학생들에게 진화론과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스스로 교직에서 물러난다. 오산학교가 기독교계의 학교이기 때문에 진화론과 톨스토이에 대해 선교 교사와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진화론은 기독교와 늘 충돌을 빚었던 생물학 이론이지만, 톨스토이의 경우는 그가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톨스토이의 파문에 대해서는 뒤의 ‘시베리아의 데카브리스트’ 편에서 상술할 예정임.)

▲ 춘원 이광수 (37세, 1929년)

오산학교를 사직한 이광수는 1913년부터 1914년 사이 중국의 만주와 상하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를 여행한다.
이광수가 이후에 다시 러시아를 여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유정>에서의 시베리아에 대한 묘사는 바로 이 시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915년 9월 최남선과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약 1년간 다닌 후 1917년 3월 이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이광수는 철학과 입학을 준비할 무렵 <대한매일신보>로부터 연재소설을 청탁받는데, 이 때 쓰여진 것이 1917년 정월 초하룻날부터 이 신문에 실린 장편연재소설 <무정>이다.
그는 대학을 1918년 여름에 그만둔다. 2년을 못다닌 것이다. 성적은 우수했다. 그런데 그시절 이광수는 애정문제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광수는 동경여의전을 나온 의사 허영숙과 사랑에 빠져, 1910년 중매로 결혼은 했으나 정이 없었던 아내와 1918년 9월 이혼을 하고 허영숙과 1921년 5월 정식으로 결혼한다. (두 사람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지만 해방 후인 1946년 5월 이혼한다.)

그런 중에도 20대 조선 청년 이광수의 가슴에는 조국애가 불타고 있었다. 그는 1919년 기미 독립선언 전,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했다가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일한 경력도 있다.
그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끌던 단체)사건에 연루되어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그는 이듬해인 1938년 병보석으로 풀려 나온 뒤 1939년부터 친일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30년에 이르고 있으니 독립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는다. 그는 1948년 친일행위와 관련해 반민특위의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다시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당시 그는 경기도 양주의 사능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병약했던 그는 납북 중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다행히 후에 북한의 부수상까지 오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이해 10월 25일 숨을 거뒀다.
그는 일제 강점하에서 걸출한 작가로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으며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친일 행위로 말미암아 그이 이름은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말로가 안타깝다.

<유정>과 배우 남정임

이광수의 <유정>은 1966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주연은 김진규와 남정임. 당시 소련과는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있는 때였으므로 설원 장면 등 시베리아의 풍경은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찍었다.

▲ 배우 남정임
 

 

 

 

 

 
 
▲ 왼쪽부터 문희, 남정임, 윤정희

유정은 남정임의 데뷔작이면서 성공작이다. 남정임은 이 데뷔작으로 단번에 정상급 배우가 되어 한국 영화의 황금기인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문희, 윤정희와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이끈다.

남정임의 본명은 이민자. 1945년 생이다. 남정임은 유정의 여주인공 공개 선발에 1천3백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뽑혔다. 유정의 히로인모집에는 당시로서는 거액인 50만원의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남정임은 이 영화로 데뷔하면서 예명을 아예 남정임으로 했다. 그녀는 2백50여편이 넘는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정상의 스타였으나 첫 결혼에 실패하는 등 사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악성종양에 시달리며 병원과 기도원을 전전하며 투병생활을 하다 1992년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0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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