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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탄생과 수난 (1):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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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의 탄생과 수난 (1)

가곡과 시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8/21 [17:11]

가곡의 탄생과 수난 (1)

가곡과 시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8/21 [17:11]

가곡과 시(詩) - (1)

▲ 경기도 화성시 활초동 283번지 홍난파 선생 생가

가곡의 탄생과 수난

우리 가곡은 1920년에 작곡된 홍난파(洪蘭坡, 본명은 영후 永厚, 1898~1941)의 <봉숭아>를 효시로 본다. 그런데 봉숭아는 그 후의 다른 대부분의 가곡처럼 곡을 붙인 것이 아니다. 처음엔 <애수>란 제목의 바이올린 곡으로 지어졌다가 그후 홍난파의 요청으로 작곡가 김형준에 의해 가사가 붙여졌다. 가사가 붙여져 <봉숭아>로 제목이 바뀐 이 최초의 가곡은 1925년 <세계명작곡집>에 처음 실렸다.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봉숭아>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일제 식민지하의 암울했던 현실에 대한 우리민족의 울분과 설움과 한을 담은 노래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봉숭아>의 가사가 볼온하다 하여 금지곡으로 정했다. 이 노래를 부를 경우 ‘사상불경죄’로 투옥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하에서 태어난 가곡은 이처럼 초창기부터 수난을 겪었다.
(주: 가곡의 역사와 관련해 간혹 1922년에 세상에 나온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생각>이 가곡으로서는 <봉숭아>보다 먼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부터 노래로 지어졌으므로 <동무생각>을 최초의 가곡으로 봐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초 바이올린 곡으로 지어졌다고는 해도 <봉숭아>의 작곡이 먼저이므로 그 서열은 존중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남북분단이 가곡에 미친 영향

일제하의 비극적 상황속에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우리 가곡 근 백년의 역사는 참으로 험난하였다. 그 또한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같이해 왔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후부터 지난 100여 년간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 국토분단과 좌우대립, 동족상잔의 6.25 전쟁, 그후 남북간 대립의 심화, 그리고 남북이 각기 이념과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해온 불안과 혼돈의 시대였다. 총체적으로 고난과 시련의 역사였다.
특히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우리 민족이 느꼈을 수모와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2세로 자살한 김소월(金素月, 본명은 정식 廷湜, 1902~1934)의 죽음이 일본 경찰의 핍박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으나 민족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문화예술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분단상황에서 작가의 월북 또는 납북은 노래(여기에서는 가곡)의 운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월북 작가의 작품은 국내에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고개>는 극작가였던 이서향이라는 원래의 작사자가 1948년 월북한 후 작곡가 이흥렬이 작사와 작곡까지 모두 한 것으로 작사자의 이름을 슬며시 바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가곡으로서 인기도 누렸다.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안했다면 <바위고개>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작곡가 나운영은 일제때 김수향(본명은 윤복진, 1908~1991)의 시 <아! 가을인가>를 가곡으로 만들어 발표했는데, 윤복진이 월북을 하는 바람에 그 곡에 자신이 가사를 다시 만들어 붙여 노래를 살려냈다.
6.25때 사라진 충북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가장 억울한 케이스의 하나다. 그는 오랫동안 월북 시인으로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노래가 됐던 <고향> <향수>등 그의 시는 사장되어 수십년간 빛을 보지 못했다.
정지용은 남한에서도 오랫동안 푸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반동시인으로 지목되어 있었으니 어찌된 노릇일까?
김소월과 동갑이었던 정지용은 6.25 전쟁 직후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어디서 사망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남북 양쪽에서 해금이 되었다고는 하나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후손들이 입은 회복 못할 상처는 과연 무엇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남(南)의 자식은 월북자의 자식이 되었고, 북(北)의 자식은 반동작가의 자식이 되어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야했다. (계속)

▲ 홍난파 흉상(서울 종로구 홍파동 홍난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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