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밤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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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밤의 향기
  •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 승인 2020.07.27 0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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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높은 이상을 향해 손 흔들던 희망의 밤이 있었습니다. 마당엔 모깃불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하늘엔 별이 있던 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바라본 밤하늘은 신비롭기만 했습니다. 카시오페아, 황소, 전갈, 쌍둥이 등 수많은 별자리만큼이나 많기도 많았던 소망을 손가락 꼽으며 헤아려보곤 했습니다. 심연(深淵)처럼 푸르른 은하수를 건너면 유성이 떨어지는 산 너머 먼 곳까지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 가득 꿈을 담아준 그 밤이 그리울 때면 불현듯 푸른 하늘과 넓은 바다가 보고 싶어집니다.

동화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안식의 밤이 있었습니다. 초가지붕마다 소리 없이 함박눈 쌓여가던 밤. 호롱불을 벗 삼아 할아버지께서 구수한 목소리로 읽으시던 ‘심청전’은 어린 우리들의 가슴까지 적셔주곤 했습니다. 생솔가지 지펴 대운 온돌 위에 솜이불 두둑이 깔고, 두 귀를 곧추 세우던 그날 밤의 정경은 어머니께서 짜주신 볼그레한 털옷을 닮아 있었습니다. 요람 같이 편안했던 그 밤이 떠오를 때면 흩어진 부모형제가 그리워집니다.

나약했던 내게 용기와 모험심을 심어준 밤이 있었습니다. 정월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아오면 건너뜸 뒷동산에서 달구경과 쥐불놀이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달이 중천에 걸려서야 집으로 향할 때면 동네 공동 우물에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 귀신이 있다는 뜬소문이 생각나 머리끝이 쭈뼛했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리다가 언뜻 뒤돌아보면 나풀나풀 뒤따라오는 제 그림자에 놀라 등줄기엔 식은땀이 흥건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듯 용기가 솟아오르는 그런 밤이면 무조건 나서서 사람 사는 틈에 서고 싶어집니다.

연분홍 꽃가슴에 고운 춘풍 불던 꿈의 밤이 있었습니다. 거울 앞에 앉아 머리단장을 하며 이유 없는 설렘에 들뜬 사춘기의 밤은, 창 밖에서 속삭이는 작은 풀꽃들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새파란 달빛 창에 흐르면 이 마음 어이하리까? 신비론 별빛 곱게 흐르면 소녀는 비옵니다.’

벅차오르는 환희에 몸을 떨며 부푼 가슴을 끝도 없이 일기장에 담곤 했습니다. 바람결에 꽃내음 날려 온 듯 그 밤이 그리울 때면 17세 소녀 되어 핑크빛 연서(戀書)가 쓰고 싶어집니다.

이승의 저편에 있다는 죽음을 처음으로 생각해 본 슬픈 밤이 있었습니다. 망태만한 혼불을 앞세우고 아랫집 할머니께서 황천길 떠나시던 날, 밤새 슬피 들리는 상엿소리에 뜬눈으로 뒤척였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저승길은 멀기도 허네. 어허야- 어허야-.”

가슴 한 복판에 벽이 막히는 절망으로 섧게 섧게 울었습니다. 무서움에 떨고 있는 동생들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피가 흐르고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된 밤이었습니다. 삶의 질곡에서 문득, 그 밤이 떠오를 때면 오히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하얀 도화지를 펼친 듯 순결한 밤이 있었습니다. 맑은 미소를 지닌 수녀님에 이끌려 성모승천축일에 참가했던 밤. 제 몸 살라 빛을 주는 제단 위의 촛불은 형용할 수 없는 숭고함으로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성모님께 헌시(獻詩) 낭송을 할 때엔 까닭 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하얀 무명베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안아보기도 했습니다. 그 밤이 떠오를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의 대상을 찾아 마음의 길을 떠나곤 합니다.

서분서분 다가와서 온몸으로 감싸주는 밤의 고요를 좋아합니다. 밝음 속에서 다친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밤의 아량을 좋아합니다. 겉몸만 달아 살던 내게, 밤은 그윽함과 은근함의 웅숭깊음 속으로 안내하곤 했습니다. 희망과 안식, 용기의 밤이 있었기에 평화로운 유년이 될 수 있었고, 꿈과 슬픔, 봉사의 밤을 보내면서 메마르지 않은 인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수련한 마음으로 기억속의 밤을 찾아 나서노라면, 어느새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삼삼한 꿈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밤들을 위해 비단실 엮어 가는 직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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