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우리나라가 한없이 허약했을 때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을 빌미로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1905년의 을사조약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여세를 몰아 한 짓이니,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후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의 만행을 저질은 것이나 똑같은 수순이다.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패배했더라면 을사조약이라는 것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독도 역시 러일전쟁이 없었더라면 일제의 관심 밖에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독도의 편입이라는 것은 러일전쟁 중 한국의 국권이 미약한 틈을 타서 먼데 있는 우리 섬을 몰래 도둑질한 것을 달리 표현한 것 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지금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거짓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고유영토라면서 왜 1905년 그때에 편입했나?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2013년 1월, <리딩 재팬> 시리즈로 발간한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란 소책자가 있다. 책자의 내용은 2012년 11월 일본연구소가 개소 8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우리는 독도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연사들이 한 강연을 원고화 한 것이다. 연사는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 박준우 전 외교통상부 아태국장 세분이었는데, 이 가운데 맨 앞에 실릴 최서면 선생의 다음과 같은 강연내용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아래 해당 강연 내용)
한국과 일본의 논쟁 중에 대표적인 대립의 예 중 하나가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논쟁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에서 우산도(독도)가 보인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가와카미 겐조의 <다케시마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를 통해 이를 부정하였습니다. 가와카미는 울릉도에서는 독도를 볼 수 없다는 도식을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이한기 교수(서울 법대)가 이를 반박하는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측량법상 도식을 통해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것을 증명했지요. 이에 대해서 가와카미는 조선의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두 섬이 서로 보인다는 것은 울릉도와 한국 본토를 가리키는 것이지 울릉도와 독도를 말한 것은 아니라며 말을 바꿨습니다. 이한기 교수가 (독도 관련 저서인) <한국의 영토>를 저술하면서 보여준 영토 연구 자세는 그의 제자인 백충현 교수가 이어받았습니다. 백충현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1년간 객원교수로 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일본의 독도에 대한 국제법적 연구에 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주 한 번 도쿄에 유학중인 대학원생들과 함께 ‘독도연구회’라는 모임을 가졌고 이를 주재했습니다. 후에 국회의 ‘독도특별위원회’를 주재하게 된 강창일 의원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백충현 교수는 1년간의 객원교수를 마치는 기념강연에서 용감하게 일본의 독도이론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그 때의 강연은 듣는 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일본 외무성은 독도와 관련된 주장을 일부 수정하게 됩니다. 백충현 교수는 “일본 정부는 독도(다케시마)가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하는데,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의 영토라면 왜 1905년에 영토를 편입하는 방법을 취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면 혼슈와 시코쿠, 규슈와 같이 영토 편입을 하지 않아도 일본 영토가 될 터인데, 국제법적 방법으로 영토 편입을 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유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는 요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 영토가 아니었던 것을 새로이 일본의 영토로 했으니 역사적인 고유의 영토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장내에는 정적만 흘렀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은 자신들이 내세웠던 종래의 주장이 모순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말을 바꿨습니다. 즉 다케시마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의 영토이며 그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1905년에 영토 편입을 했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한기, 백충현 교수는 일본 측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서면 선생은 이 강연에서 ‘동해’를 일본이 ‘일본해’로 표기하게 된 것도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한일 양국의 영토문제에 있어서 동해냐 일본해냐는 대립이 있는데, … 일본 고지도는 동해를 일본 북해로, 태평양을 일본 남해로 표시하는 것이 전통적인 일본지도의 표현양식이었습니다. 일본 북해가 일본해로 대중화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함대에게 승리한 일본 해군성이 일본 오키섬과 울릉도 사이의 바다에서의 전과(戰果)를 ‘일본해 해전’으로 칭한다고 공표하면서 일본해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상식으로 전해집니다.
앞에서 한일간에 독도가 울릉도에서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는 논쟁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 논쟁거리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