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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2):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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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2)

현종의 며느리였던 양귀비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5/12 [07:46]

'장한가'를 통해 본 비운의 양귀비 (2)

현종의 며느리였던 양귀비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5/12 [07:46]
▲ 양귀비꽃

주) 양귀비의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으로 추정된다. 양귀비는 영어와 불어, 독어 등 유럽 각국어로 opium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 opion(양귀비의 즙액)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오피움’을 음역하여 ‘아편(阿片, 중국어 발음은 아폔으로 우리말 발음과 비슷하다)’이라고 불렀다. 또한 아편꽃의 아름다움이 당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비길만 하다고 해서 양귀비로도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양귀비꽃은 붉은색이 가장 많으나 분홍, 흰색 등도 있다.

용기있고 현명했던 현종 황제

만년에 이렇듯 스타일을 구기는 현종이지만, 젊은 시절 현종은 용기있고 총명한 황제였다.
현종은 당왕조에서 가장 영명한 군주로 꼽히는 태종(太宗, 이세민)의 증손이다. 태종의 후계자가 된 아홉째 아들 고종(高宗) 이치(李治)와 고종이 죽은 후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가 되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손자 가운데 하나다.
서기 705년 겨울 측천무후가 83세로 세상을 떠나자 태자 이현이 황위에 올라 중종이 되었다. 중종은 무후가 690년에 주(周)로 바꾸었던 국호를 다시 당(唐)으로 돌려 놓았다.
원래 중종은 서기 683년 그의 아버지 고종이 죽은 후 제위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겨우 2개월만에 어머니인 무후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부인 위(韋)황후가 친정 아버지 위현정(韋玄貞)을 문하시중이라는 요직에 기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중종이 쫓겨난 후에는 동생인 이단(旦)이 684년에 즉위해 예종[睿宗, 훗날 현종이 되는 이융기(李隆基)의 아버지]이 되었으나 예종도 황제의 자리에는 6년 밖에 있지 못했다. 690년에 무후가 예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쫓겨난 중종은 노릉왕이 되어 지방을 전전하다가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기 8년전 낙양으로 돌아와 다시 태자가 되었다. 그후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의 아내 위씨도 황후로 복위되었다.
그런데 중종은 지방에 있을 때에 몇차례 자살을 기도한 일이 있었다. 무후가 자신이 낳고 태자로 세운 장남 이홍(李弘)을 죽인 일이 있었으므로 중종도 항상 무후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몇번 자살을 꾀했었다. 그때마다 부인 위씨가 위로하여 생각을 바꾸었는데, 언젠가 중종은 위씨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맹세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훗날 다시 황제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리다.”
그래서 중종이 다시 황제가 되자 위황후는 이 약속을 내세우며 항상 중종과 더불어 정사를 보았다. 과거 측천무후가 유약한 남편 고종을 대신하여 정무를 본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이는 물론 중종이 허약하고 우유부단하여 황제의 재목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위황후는 시어머니 측천무후를 선망해 왔다. 그녀의 꿈은 측천무후와 같은 여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위황후는 궁중에 자주 드나들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의 시아버지인 무삼사를 비롯, 마진객, 양균 등과 불륜의 관계를 갖다가 중종이 이를 눈치채자 마침내 수하들과 함께 중종 시해의 음모를 꾸몄다. 일당은 710년 6월 고기만두 속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하였다. 사인도 제대로 발표되지 않았다. 눈치빠른 어의들은 ‘과로한 정무로 인한 돌연한 심장 발작사’로 결론을 지었다. 그후 위황후는 중종의 유지라 빙자하여 중종의 넷째 아들 온왕(溫王) 이중무(李重茂)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시작하였다.
측천무후가 황후에서 황태후가 되고, 황태후에서 여황제가 된, 같은 길을 위황후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사태가 이같이 발전되자 지난날 예종황제의 셋째 아들인 이융기가 분연히 들고 일어났다. 그는 고모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모의하여 어느날 궁정을 습격, 위황후와 위씨 일당을 치고 위황후의 목을 베어 성벽에 내걸었으며 아버지 예종을 복위시켰다. 측천무후가 죽은지 5년후인 710년의 일이다. 이 공로로 태자가 된 이융기는 2년 후 예종황제의 선위를 받아 28세 때 당나라 제6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분홍색 양귀비꽃이 붉은 양귀비꽃 사이에 피어있다.

개원의 치

현종은 즉위한 이듬해인 713년, 태자 시절 자신을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모함했던 지난날의 동맹자 태평공주 일당을 처벌하고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고쳤다. 그후로 태평한 세월이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왔다. 천재지변도 적었고, 우려할 만한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다. 중국 역사상 전에 없던 풍요로운 시대였다. ‘사치금지의 제칙’을 발표해 궁중에서부터 민가에 이르기까지 주옥, 금·은 장식과 비단류를 금하는 등 근검절약의 기풍을 엄히 세워 국고를 튼튼히 한 덕이었다. 그리하여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하면 태평성대를 뜻하는 말로 쓰여지기도 했다.
장안(지금의 서안)이 가장 번창했던 시기는 현종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개원연간 29년과 이에 이어지는 천보(天寶)연간의 초기였다.
현종은 ‘개원의 치’를 만들어낸 현명한 천자였으며, 예술방면에 관심이 깊었고, 특히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기도 했다.
영명하던 현종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은 개원 24년(736년)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였다. 이때 현종의 나이 52세였다.
무혜비는 측천무후의 일족인 명문가 출신으로 재기발랄하여 모든 일에서 현종의 좋은 상담 상대가 되었었다. 또한 빼어난 미인으로 40세까지 젊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여인이다. 무혜비의 죽음은 현종을 크게 상심시켰고 그를 무척 고독하게 만들었다. 후궁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현종의 마음을 끌지 못하였다. 무혜비가 죽은 후로는 환관 고력사가 천거한 매비(梅妃)가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현종은 무혜비를 잊지 못했다. 무혜비는 풍만농염형(豊滿濃艶型)의 여자였던데 비해 매비는 청초가련형(淸楚可憐型)이었다. 무혜비가 죽고 나서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개원 28년(740년) 고력사가 어느날 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壽王)의 비(妃) 양옥환(楊玉環)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수왕비라면 죽은 무혜비의 아들인 이모(李瑁)의 아내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수왕비는 천하의 절색일 뿐 아니라 몸에서는 향옥같은 향긋한 땀내가 나며, 음율에도 밝아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는 소문이었다. 고력사는 이러한 소문을 현종에게 아뢰었다. 현종은 그러한 수왕비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마침내 고력사로 하여금 양옥환을 여산 화청지의 온천궁(후에 화청궁이 됨)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그리하여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혼인한 지 5년만에 생이별을 하고 시아버지인 현종 앞에 불려가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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