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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의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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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의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5/10 [12:44]

여순 감옥의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5/10 [12:44]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여순감옥에서는 그 뒤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열악한 감방생활을 하다가 순국했다.
중국 당국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흉상을 세워 숭모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민족사관을 정립한 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과 많은 재산을 팔아 중국 길림성에 독립투쟁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에 대해서도 여순감옥 감방 앞 복도에 두 분을 기리는 표지로 사진과 순국까지의 활동 내용 등을 커다랗게 붙여놓았다. 다음은 두 분에 대해 기록해 놓은 내용이다.

▲ 여순 감옥 복도 벽면에 신채호 선생의 순국에 관한 내용이 붙어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옥고를 치른 감방이다. 신채호는 사학자와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민족의식을 높이고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1923년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했으며, 이 선언에서 그는 무장항일투쟁을 주장하였다. 1925년에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무정부주의 사상을 선택하였다.
1928년에 대만 기륭우체국에서 체포되어 1930년에 10년형을 선고받고 이곳에서 복역하다 1936년 2월 21일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이회영 선생의 순국에 관한 내용. 일제는 선생의 순국을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조작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 옥고를 치른 방이다. 1910년 대한 제국이 멸망하자 이회영 선생을 포함한 6형제 60여 명 일가족 전체는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많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이주하여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무장투쟁의 근간인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립, 유지되었다. 1923년부터는 신채호 등과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의열단’ 1925년 ‘다물단’, 1931년 ‘흑색공포단’ 등 항일운동 행동 조직을 후원, 지도하였다.
1932년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대련으로 가던 중 피체되어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11월 16일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중국 정부는 2000년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 여순감옥의 고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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