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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청 탐구(2)] 조선의 부동산 투기꾼 공주사람 김갑순.: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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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충청 탐구(2)] 조선의 부동산 투기꾼 공주사람 김갑순.

신수용 대기자 | 기사입력 2019/05/16 [10:29]

[기획. 충청 탐구(2)] 조선의 부동산 투기꾼 공주사람 김갑순.

신수용 대기자 | 입력 : 2019/05/16 [10:29]

충청은 지금 정치권에서 보는 변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숨결이 살아있고 금강과 계룡산, 칠갑산, 속리산을 중심으로 인심이 후한 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때문에 역사의 창고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역사 백제라고 말하지만 선사이래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시대, 구 한말과 근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토의 중심부에서 영욕의 세월과 부침이 있던 곳이지요. 그렇기에 충청의 모든 것은 역사와 우리 민족의 산 증인인 셈입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돌 하나, 풀 한포기, 깊은 숲 대나무 한 그루, 무너진 성터... 모두 인고의 세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가둬 둘 수도, 그렇다고 열어놓을 수 없는 역사 속에 충청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조명할 이유입니다. 세종경제신문이 창간 6주년을 맞아 <탐사기획>으로 충청 100년의 숱한 얘기들은 집중탐구합니다.거기에는 인물. 문화재. 유적. 유물. 사변 등 충청역사를 싣습니다. 필자는 대전일보사 기자일 때 사건 반세기를 주1회 1면씩 58편까지 릴레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글을 중심으로 다루겠습니다. [편집자 주]

고은은 전북군산이 고향이지만, 어릴 적 외가인 충남서천 장항과 고모댁인 부여에서 자라 충청에대해 애정이 많은 이다.

고은이 쓴 ‘만인보(萬人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누덕누덕 기운 바짓가랑이에 

진창길 흙범벅 묻어마를 줄 몰랐다

괜찮았다. 기운 버선 신어신발밑 울퉁불퉁하였다.

삼십리길 심부름 가고 갔다 숨차 돌아왔다.

괜찮았다 밤늦게 와쪽소반 밥상이래야

이 대궁 저 대궁 담은 찬밥덩어리

짠지 한 가닥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본디 조선 말년 공주 감영 방자놈이었다.

잔뼈로 목민관 눈치 알고이속들 눈치 먹고

세상 물정 빤히 익혔다

그러다가  구한말 홀로서서

저자 모퉁이 오두막 하나 자리 잡아

긁어온 솔잎 땔감 동나면

쇠똥 말똥 주워다 말려

그것으로 방 한 칸 식지 않았다

꽁보리밥 한 사발 묵은 된장국 한 사발

이것이면 온 세상이 다 내 것

임금이 죽고또 새 임금이 죽더니

일본 세상이 되자 

공주 장터 국밥집국밥 부지런히 날랐다

그러다가 감영 끝물 인줄이 닿아일제

 군수로 껑충 뛰어 오르니

어렵쇼  도깨비들 방아 찧나

상놈 5대조 음덕인가

어렵쇼1천 5백 정보 논밭 지주가 되었구나

어렵쇼 3만 4천석 호족이 되었구나

어렵쇼  공주 저쪽 논산벌에도

한양 우의정네 마름이던 김철수가

아흔아홉 칸 저택을 지은 뒤

가마 타고 공주에 납시어

공주 갑부한테

사윗감 줄 터이니

딸 달라고 청혼하자

예끼 이놈 네 쌍놈의 들판에

어찌 내 귀한 딸을 보내겄느냐

썩 꺼지시겨 꺼지시겨

퇴짜를 놓았다.

허허 누가 누구여

침 탁 뱉고 얼른 하이야 

대령하여  유성온천  일본여관으로 납신 김갑순께서

소실 유심이를 불러들였다

겉으로 언짢은 듯

 시쁜 듯입안에 침 고인다

네년.

구한말부터 충청의 역사를 조명하다보니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1872~1960)이 등장한다. 구한말부터 충청의 역사를 조명하다보니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1872~1960. 창씨명 金井甲淳)가 등장한다. 김갑순하면 또오르는게 친일파, 대전역, 공주감영, 충남도청등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구한말 최고의 부동산 투기꾼이었다는 사실은 잘모른다. 그저 공주에서 이전해올  옛 충남도청사(대전시 중구 선화동)의 땅이 김갑순이 내놓은 것이었다.
 김갑순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조선의 최대 갑부였다. 땅 투기꾼의 원조였던 셈이다.

충남도청 소재지가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오면서 대전역에서, 도청사인 대전 중구지역의 발전의 근간을 이룬다.

조선말엽 대전은 공주부(公州府) 관내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1910년도 대전의 최고 번화가인 대전시가지[사진=대전시사 제공]
1910년도 대전의 최고 번화가인 대전시가지[사진=대전시사 제공]

 

그러던 것이 1904년 러ㆍ일전쟁 무렵부터 철도가 건설되고 주요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도시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갑순은 몇해전 한 매체에서 ‘민나 도루보데스(모두 도둑입니다)’라고 소개된 인물이다.

거부들 가운데 당대에 발복(發福)하여 그 이만큼 재산을 모은 부자 흔치 않다.

또 그 많던 재산이 한 대(代)를 넘기지 못하고 당대에서 끝난 것도 드문 경우에 속한다

김갑순은 앞서 언급했듯 부자가 된 직접적인 계기는 땅투기였다.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선(京釜線) 철도가 놓인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 빈 땅으로 이던  '한밭(大田)' 일대의 땅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그는 일찍부터 이 곳을 주목하여 집중적으로 땅투기를 했던 것이다.

경부선 철도가 대전을 통과하게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땅 값이 엄청나게 뛰었다.

친일파 김갑순[사진=충남도사 제공]
친일파 김갑순[사진=충남도사 제공]

땅 짚고 헤엄치는 방식으로 돈을 번 셈이다.

1930년대 후반 당시에 대전시 면적의 40%가 김갑순의 소유였다. 그러니 어느 학자의 말대로 '한밭'이 '대전'으로 개발되면서 생긴 엄청난 시세차익을 챙겨, ‘대전시=김갑순시’로 불렸을 정도다.

◇그의 인생 역정=그는 고종 9년인 1872년 공주시내에서 김현종(金顯宗)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과 형님을 여의고 13세 때 호주가 됐다.  어린 시절 모친은 장터에서 국밥 장사를 하였고, 그는 공주 감영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관노(官奴)였다. 하잘 것 없는 신분으로 초년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거기서 만난 묘령의 여인을 만난다.

김갑순은 훗날 의남매를 맺은 이 여인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여인은 충청감사의 소실이었다.  김갑순은 이 여인의 도움으로 노비의 신분을 벗고 아전(衙前), 즉 공주감영의 하급공무원이 됐다.

기록에는 그가 공주감영 아전이 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겨울에 눈이 오면 새벽부터 감영 마당에 쌓인 눈을 부지런히 쓸었다. “갑순아! 이리 와서 화로에 손을 녹였다가 쓸어라!” “아닙니다 나으리. 이거 마저 쓸겠습니다.” 이렇게 성실하니 윗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요강 당번이 최하층 천민의 더러운 일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윗사람들과 직접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윗사람의 인정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기록은 또 '천민이 가장 말단 9급이기는 하지만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노예가 시민권을 딴 셈이다. 김갑순은 공무원 월급을 타면 윗사람에게 모두 상납할 만큼 처세를 잘했다. 자신은 부스러기 부수입으로 생활을 했으니, 윗사람이 볼 때 ‘저놈은 참 기특하고, 사람 되었다’였다. 그러니 승진할 수밖에.없었다'고 되어있다.

1920년대 공주시가지[사진=사진 충남도사 제공]
1920년대 공주시가지[사진=사진 충남도사 제공]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갑순이 어느 날 투전판으로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인질로 붙잡혀 있던 젊은 여인을 구해주고 의남매를 맺었는데, 나중에 이 여자가 충청감사의 소실로 들어가게 됐고 감사에게 김갑순 이야기를 잘해서 아전이 됐다는 설도 있다. 이런 걸 보면 김갑순이 의협심도 있고 사람에 대한 인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또한차례의 반전이 있었다. 아전으로 있던 김갑순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어느 날 석양이 질 무렵, 공주감영으로 찾아온 허름한 선비를 만나면서다.

일제때의 대전역 주변[사진=대전시사 제공]
일제때의 대전역 주변[사진=대전시사 제공]

충청감사를 면회하려고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선비를 딱하게 여긴 김갑순이 자초지종을 묻는다.

선비의 얘기는 과년한 딸이 있는데, 혼수비용이 없어서 옛친구인 충청감사를 만나려고 했으나, 만나 주지를 않아 빈손으로 돌아가게됐다는 사연이었다.

김갑순은 선비의 딱한 사정을 듣고 조랑말에 광목과 기전을 실어 혼수를 장만해준다.

몇 년 뒤, 김갑순의 혼수의 도움을 받은 이 선비가 호조 판서 이용익이다.

이 판서는 사람을 공주로 보내 김갑순을 서울로 불렀다고 한다.

축지법을 쓴다 할 만큼 발이 빠른 이용익을 김갑순은 따랐다.  김 갑순은 이용익에게서 보부상의 이재를 터득하고 돈을 모았다.

◇김갑순의 매관매직과 부동산 거부=이후 1900년 김갑순은 첫번째 매관매직을 감행한다. 그는 관학분(주사급)에 오르고  관청내에서 나도는 정보에 귀 기울인다.

당시 그를 볼수 있는 ‘구한말 관원(官員)이력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최근 복원된 충청감영[사진 =테스미디어켑처]
최근 복원된 충청감영[사진 =테스미디어켑처]

그는 1900년 충북 관찰부 주사(판임관 8등)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듬해 중추원 의관을 거쳐 그는 그 해 11월 내장원 봉세관(捧稅官)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봉세관으로 근무하면서 충청남도 지역의 역토·둔토·개간지에서 도조(賭租)·해세(海稅)·포사세(庖肆稅) 등을 수납했다.

그는 벼슬자리 욕심보다는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때부터 치부를 시작하여 여기서 모은 돈으로 군수자리를 하나 샀다. 그게 충남 부여군수다.

구체적으로는 1902년 4월 충청남도관찰부 부여군수에 이어 1903년 8월 (논산)노성군수, 1905년 6월 (부여)임천군수, 1906년 7월 공주군수, 1908년 강원도관찰도 김화군수, 1909년 9월 충청남도관찰도 사무관, 1910년 1월 충청남도관찰도 아산군수를 지냈다.

아산군수 시절에는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할 뻔했으나 ‘을사늑약’으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재임시절에 맺어둔 인맥을 총동원, 사전에 입수한 개발정보를 활용해 투자하거나 일제당국으로부터 인·허가권을 특혜로 획득하여 사업을 확장하였다.

김갑순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조선 제일의 땅부자가 되었을까.  의문에 비해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탐관오리와 전형적인 투기꾼의 일을 했다.

 6개 군의 군수를 지내면서 그는 공공연히 세금을 횡령하였다.

일본은 그 무렵 청일전쟁을 도모하고 그 발판으로 철도건설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이 퍼졌다.

 노선이 알려지자 공주의 유생들이 철도건설을 반대하고 나선다.  경부선의 노선이 변경될 처지에 놓인다.

김갑순은 식산은행으로부터 저금리의 융자를 받아 대전과 유성 쪽의 황무지 땅을 사들인다. 무려 20만평에 달한다.

1905년 서울과 초량 간 445㎞ 경부선이 대전을 경유하면서 김갑순은 갑부로 만들었다.

그가 매관매직으로 얻은  공주 군수, 아산 군수때는 황무지 개발에 손을 댔다.

해방된 뒤 친일행각을 벌인 도지사. 장관, 군수등이 조사를 받기위해 끌려가고 있다[사진=대전시사 제공]
해방된 뒤 친일행각을 벌인 도지사. 장관, 군수등이 조사를 받기위해 끌려가고 있다[사진=대전시사 제공]

 이어 1930년엔 1000 만평을 사들여 온양온천을 개발하고 극장을 여러 군데 지어서 문화사업에도 눈독을 들인다.

그는 또 대전의 땅도 사들인다. 곧이어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할 것이라는 정보를 이용한 것이다. 당시 대전지역의 부지 57만평 가운데 22만평이 김갑순의 땅이었다.

배꽃문양 기둥을 한 대전시내 충남도 청사가 들어선 건 1932년이다.

그무렵 떼돈을 번 김갑순은 재벌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1932년 그는 대전지역 유지들을 동원,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김갑순이 1∼2전(錢)을 주고 산 대전의 땅이 하루아침에 1백 원 이상으로 뛴 것이다.

◇김갑순의 달라진 신분=대전은 무명의 지역으로 너른 벌판에 한적한 곳이 었으나, 조선인이 경부선과 호남선이 개설되면서 급속히 발전했다.

당시 1917년 대전의 인구는 조선인이 1800여 명, 일본인이 5800여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옛 충남도청사 건물의 추녀 등에 연꽃인지, 배꽃문양인지 지금도 있다.

어여쁜 첩도 둘씩 집에 들인다. 연전의 한 드라마에서 김갑순의 집에서 경옥고 끓이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했다는 대목이 있다.

일제시대 대전역[사진=대전시사 제공]
일제시대 대전역[사진=대전시사 제공]

경옥고를 끓이던 하인이 가마솥 뚜껑을 열고 조금이나마 간을 보는 재미에 밤 새는 줄 모르고 불을 지폈다고 한다.

그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도로공사를 할 때 인부와 부지를 제공했다.

애를 들어 1912년 3월 충청남도 노성군 도로공사를 시작으로 부여와 공주 간 도로, 논산 내 도로, 경상남도마산과 칠원 간 도로 등 다수가 있다.

그 대가로 조선총독부가 1913년 3월과 10월, 1914년 12월, 1915년 12월 등 4회에 걸쳐 목배(木杯)를 내렸고, 1914년 5월과 1915년 12월에 은배(銀杯)를 주었다.

◇충남평의원등 친일 행각= 그러니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인다.  한편으로는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로도 그는 계속 관(官)과 줄을 대고 있었다. 

1914년 그는 충청남도 참사(參事)를 거쳐 1920년에는 충청남도 도(道)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돼 이후 3회 연속, 9년간 재직하였다.

그는 또 공주읍회 회원 2회, 충남도회 의원 4회, 충남도농회(農會)부회장, 우성(牛城)수리조합장,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일제 초기 그가 친일 관변단체에서 활동한 것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신용을 확보하고 조선인 친일세도가들과의 유대형성이 주목적이었다.

김갑순이 시작한 유성온천장[사진= 대전시사 제공]
김갑순이 시작한 유성온천장[사진= 대전시사 제공]

대전군 유성면(대전시 유성구)에 있는 유성온천을 주식회사로 개발하여 1921년 11월 대전온천주식회사(이후 유성온천주식회사로 개칭) 전무로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전유성= 온천'이란 이미지를 갖게됐는 지 모른다.

여기에다, 대전역과 유성온천을 왕래하는 자동차 운수업에도 손을 댔다. 자동차 운수업을 계속 확장하여 공주·대전·금산·평양·대구·안동 등에서 여객운수사업을 했다.

심지어 공주 금강 공북루의 나루터에서 배를 태워주고 배삯을 받는 사업까지 할정도 였다.

1920년 창립한 해동은행에 대주주로 참여했고, 1921년 공주전기에 주주로 참여해 이사, 같은 해 설립한 공주식산에서 이사, 1922년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주주로 참여했다.

1926년 논산극장과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1927년 9월 충청남도공주군우성면의 우성수리조합 조합장이 되었다.

현재 대전시 중앙통에 있었던 당시 영화관 경성관[사진= 대전시사 제공]
현재 대전시 중앙통에 있었던 당시 영화관 경성관[사진= 대전시사 제공]

1927년 내선융화를 주장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공주지부 상담역이 되었고, 1929년에는 평의원이 되었다.

1928년 조선소방협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으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1년 2월 ‘매일신보’ 충청남도지국 고문에 추대되었다.

1932년 10월1일,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며 김갑순의 재산이 한차례 더 늘어났다.

충남도청이 대전에 있는 김갑순의 부지 위에 세워지면서 도청 인근에 있던 김갑순의 토지(대흥동·은행동·선화동·대전역전)가 전부 대지로 개발됐다. 이 때 집세가 4∼5배로 올랐다.

 

 

이 무렵 김갑순의 드러난 재산은 토지는 공주와 대전 지역에 논 1,200여 정보, 밭 250여 정보, 기타 1,800여 정보 등 3,300여 정보로 2만석을 헤아리며 충청남도 제1의 부호가 되었다. 1931년 대전극장, 1932년 공주극장을 설립했다.

1932년 2월 애국기 ‘조선호’ 헌납을 위한 충청남도지역 모금운동의 상임위원을 맡았다. 1935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수여했다. 1937년 유성온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이후 그는 기득권유지와 재산보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친일대열에 가담하였다. 일제 황민화운동의 첨병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시 그는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이 연맹의 경성(京城)연맹 상담역에 취임하였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충남대표 등 일제 말기 그는 충남의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활동했다.

김갑순의 성공비책은 탁월한 축재술과 ‘인맥관리’라고 한다. 피붙이 가운데 유력자가 별로 없었던 그는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통해 인맥을 구축하였다. 김갑순은 호적상 아들 일곱과 딸 넷을 두었다. 결혼 전에 사망한 4남·6남을 제외하고는 전부 지역유지나 세도가 집안의 자제들과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장남(1899년생) 종석과 장녀 정자( 1909년생)의 경우다. 종석의 첫 부인은 전 내장원경(內藏院卿, 종2품 칙임관) 김윤환의 딸 김학필(1932년 사망)이었고 두번째 부인은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의 딸 이절자였다.

장녀 정자는 충남 아산 둔포 출신의 윤명선과 결혼하였다. 윤씨는 좌옹 윤치호와는 5촌간으로 그의 부친 치오(致旿)는 한말 학부(현 교육부)학무국장 출신으로 ‘한일병합’후 중추원 찬의를 역임하였다. 윤명선 본인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국무성 사무관, 간도성 차장 등을 지냈다.

김갑순의 묘 [사진=블로그ksh3351 켑처]
김갑순의 묘 [사진=블로그ksh3351 켑처]

이밖에 7남 종소는 ‘매국노’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후작 습작, 당시 경성부 옥인동 거주)의 딸과 결혼하였다. 다른 자식들 역시 모두 경성(京城, 현 서울) 거주 유명인사들의 자제들과 혼인시켰다.

김갑순이 여러 사돈 중에서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람은 장남의 장인이었던 김윤환이었다. 김윤환은 공주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데다 명망가로 평판이 나 있었다. 김갑순은 그의 신망을 사업에 활용할 욕심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의 인맥관리도 뛰어났다고 한다. 회갑(1932년 5월)때 명사들이 보내온 축시(祝詩)를 모아 출간한 ‘동우수집(東尤壽集)(東尤(동우)는 김갑순의 아호임)에는 당대의 거물인사들이 총망라돼 있다.

박영효(후작), 이해승(황족, 후작), 민영휘(황실 외척, 자작), 민병석(중추원고문), 이창훈(이근택 아들, 자작), 권중현(을사오적 중 1인, 자작), 윤치호(전 학부협판), 이윤용(중추원고문, 남작), 민건식(중추원 참의, 남작) 등등.

그는 이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신분상승과 동시에 축재의 기반으로 활용하였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친일파’라는 점이다.

그의 친일행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있다. 그는 일제에 아부할 목적으로 밀정(密偵, 스파이) 짓을 했다. 단군교 계열의 민족단체인 금강도교(金剛道敎)의 비밀을 탐지, 일경에 밀고하여 금강도교의 교두(敎頭)이하 간부 전원을 투옥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피검된 교도는 63명, 이들 중 3명은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김갑순의 묘 비석[사진=블로그 켑처]
김갑순의 묘 비석[사진=블로그 켑처]

이를 계기로 김갑순은 일경의 비호를 받으며 금강도교 소유의 단군성전을 압수하여 여기에 ‘역대 총독 열전각(歷代總督列傳閣)’을 건립하였다. 단군상 대신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해놓고는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해방 후 그는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인 김명동 반민특위 조사위원 일행에게 체포돼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반민족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김갑순은 대신 가계가 급격한 몰락을 맞게 된다. 1949년 농지 개혁, 1953년 화폐 개혁, 그리고 친인척 간의 재산 분쟁으로 급속하게 패퇴했다.

김갑순은 재기를 위해 1950년 5월 1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 두 아들과 장손자를 공주 지역과 대전 지역에 출마시켰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투입하고도 모두 참패하였다.

그는 6·25 때 악덕부자로 분류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됐으나 인민군 장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 인민군 장교는 평소에 김갑순에게 신세를 많이 졌던 '마름'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김갑순은 89살까지 살다가, 1960년 어느날 찹쌀떡 하나 먹다가 목에 걸려 죽었다. 한 재벌의 허망한 죽음까지도 화제가 되었다 한다.

※자료 출처= 대전 사지, 충남도지,  공주군지. 변평섭의 충남반세기. 신수용의 사건 반세기. 6.25 전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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