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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 감시 속에 살다 친일시 쓴 이원수:세종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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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 감시 속에 살다 친일시 쓴 이원수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3)

이정식 / 언론인 | 기사입력 2014/04/22 [21:46]

일경 감시 속에 살다 친일시 쓴 이원수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최순애의 <오빠생각> (3)

이정식 / 언론인 | 입력 : 2014/04/22 [21:46]
▲ 이원수문학관 내부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이원수는 감옥에서 나와 다시 함안금융조합에 복귀했으나 그후 요주의 인물이 되어 늘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이후 그는 친일시들을 쓰게 되는데 이것은 그에게 평생 큰 멍에가 된다. 이원수문학관에는 ‘일제 말기 친일 작품’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설명과 친일시도 붙여 놓았다.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전시한 이원수문학관

“(이원수는)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하여 다니던 때인 1942년 8월에 조선금융여합조합회의 국책기관지『반도의 빛』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글을 남겼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 높히 군가가 울렸습니다.

정거장, 밀리는 사람 틈에서
손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
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소리는 하늘에 찼네.

---(후략)---
- <지원병을 보내며> (1942, 『반도(半島)의 광(光)』)

이어지는 설명:
친일글을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구백삼십칠 년에 나는 함안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 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이원수 <털어놓고 하는 말>, 1980)

기념관 측은 여기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신변이나 가정 경제에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친일글을 썼다는 것은 민족에게 죄를 지은 일이었으며, 그의 활동과 정신에 큰 오점을 남긴 일이었다.”

▲ 이원수문학관에 게시되어 있는 이원수의 친일시

이러한 게시물 옆에 ‘일제말기 친일 작품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이 시기 이원수에 대한 세 사람의 평가도 적혀있다. 그 가운데 두개의 평가를 옮긴다.

이원수가 ‘함안금융조합’에서 “전표와 주판과 묵직한 장부를 만지며 몇 해를” 보내며, 부왜작품(친일작품)들도 내 놓았을 때는 나이 삼십대 초반이었다. ‘강제노역’과 ‘강제사찰’이 늘 저질러지고 있었던 그 무렵, 아무리 대표적인 국책기관에서 일하는 지역 엘리트였다 하더라도, 한 차례 투옥 경험을 지닌 ‘사상전과자’ 이원수의 삶이 매끄러웠을 리는 없다. 그런 가운데서 1942년과 1943년에 그는 부왜작품을 내놓고 있다. 이른바 ‘생계형’ 부왜의 전형으로 몰아가 버리는 길도 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부왜의 뜻과 열정이 사뭇 극진하고, 수사적 차원을 뛰어넘고 있다는 데 문제가 크다. (박태일, 이원수의 부왜문학연구, 배달말, 2003)

선생만큼 불의와 부정을 싫어하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난적이 없다. (중략) 이렇게 살았던 태도로 미루어 선생은 일제 말기에 한 때 저질렀던 그 친일 행적을 뼈아프게 뉘우쳤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선생은 그 부끄러운 친일 동시를 썼던 몇 해 동안의 죄를 갚기 위해 그 뒤로 그 몇 해란 세월의 꼭 10배나 되는 동안을 (한평생을) 우리 어린이와 겨레를 살리기 위한 작품을 써서 남기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오덕, 이원수 선생의 일제 말기 친일시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보, 2002)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1941-1945) 기간동안 일제는 학도병, 징용, 정신대 등 각종 형태로 우리민족을 전쟁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러한 광풍 속에서 국내의 지식인 대다수가 친일로 돌아섰다. 이원수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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