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잡지가 부부의 연 맺어줘 이원수와 최순애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 알게 되어 서로 편지와 사진을 주고 받으며 사귀게 되었다. 최순애는 당시 인천에 살고 있었다. 오빠 최영주가 <개벽>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최영주는 방정환, 마해송,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운동을 폈던 이다. 그런데 결혼을 약속한 후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졌다. 이원수가 ‘반일 독서회’ 사건으로 갑자기 구속된 것이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던 이원수는 1931년 이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함안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다. 지금 경남 함안군 말산리에 있는 한국농촌공사 함안지부 자리에 있었다. 최순애는 그 동안을 잘 견디어 내었다. 이원수의 출소 후 두 사람은 1936년 최순애의 집 즉 처가가 있는 경기도 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마산합포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최순애는 결혼 후에는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선생의 뒷바라지와 2남 2녀를 키우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문학의 꿈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이따금씩 쓴 그녀의 시편이 유고로 남아 이원수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다. 서울 간 오빠는 돌아오지 못했다 최순애가 <오빠생각>을 쓴 사연도 잠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귀국 후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늘 일경의 감시를 받았으며 그 때문에 숨어지낼 때가 많았다. 최순애의 <오빠생각>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그런 오빠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시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울고 작곡가 박태준은 마지막 귀절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를 작곡할 때 “흐르는 눈물이 오선지를 흥건히 적셨다”고 후일 회고했다. <저작권자 ⓒ 세종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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